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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명량해협과 명량대첩(鳴梁大捷) 및 진도대교

노촌魯村 2011. 11. 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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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해협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과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명랑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명량해협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서해의 길목이다. 전라남도 해남과 지도 간의 좁은 해협인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이다. 물길은 동양 최대 시속인 11노트에 이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소리가 크고, 거품이 일며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이다.

명랑해협은 바다라기보다 홍수 진 강물로 보일 정도로 물길이 소용돌이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려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 정도이다. 거기에다 어느 때는 아주 깊은 음정으로 크게 우는 소리를 내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바다가 소용돌이쳐 운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울돌목’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명량해협은 ‘울돌목’의 한글 표기를 대신한 한자 표기이다.

명량해협은 가장 좁은 지점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팔 모양처럼 점차 넓어진다. 그래서 이 지점은 며량해협의 물목이 된다. 명량해협은 폭이 좁을 뿐 아니라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살이 여기에 부딪쳤다가 솟아올라 물소리가 우렁차다. 바닷물은 해협을 하루에 네 번씩 교차하는데, 아침 무렵에는 남동쪽인 완도 방면에서 목포 방면인 북서쪽으로 흐른다.

명량해협은 빠른 물살이 형성하는 청정해역 덕분에 관광, 청정 농수산물 생산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1984년 명량해협에 다리가 놓임으로써 진도는 한반도의 최남단이 되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진도대교이다. 진도대교의 준공으로 인해 진도는 아름다운 낙조와 야경,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이 장관을 이루어 진도의 특산물, 문화예술과 함께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외국인을 포함하여 연간 약 260만 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국제적 관광명소가 되었다.

진도는 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위치하여 작게는 서남해 섬지역과 섬지역, 그리고 크게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한국의 전근대사에 있어서 진도와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가로지르는 해로는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했고, 진도지역으로 하여금 남다른 역사적 경험을 하게 하였으니, 명량해협을 무대로 한 이순신의 명량대첩이 그것이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명량해협을 포함한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는 고대로부터 중국, 한반도, 일본을 연결한 국제문화의 주요 이동로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조운로(漕運路)로써 그 의미가 돋보이는 바닷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진도의 입지적 조건으로 인해 진도의 문화는 중층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진도의 문화는 남해안 문화와 서해안 문화가 어떻게 교류하고 교차, 융합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한다.(디지털진도문화대전)

  • 규모 : 길 이 : 484m, 폭 : 11.7m
  • 소재지 :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문내면 학동 사이
  •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 사이에 놓여진 길이 484m, 폭 11.7m의 사장교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어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5년 12월 15일 제 2진도대교가 개통되었으며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돌목 물살은 장관을 이룬다.
  •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 대교 아래가 바로 울돌목이다. 암초에 빠른 물살이 부딪쳐 소리가 날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이름나 있다. 물살이 빨라 요즘도 웬만한 배는 물살을 거슬러서 올라가지 못한다.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이 울돌목

     

     

     

     

     

    명량대첩 :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였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은 그해 7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는 전력은 전선 13척과 수군 120명뿐이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을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몇 차례 기습공격을 해왔으나 조선 수군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7년 9월 14일 적선 55척이 어란포에 정박하자,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겨 명량을 앞에 두고 진을 설치했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적선 130여 척이 명량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로 돌진해오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명량은 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9월 16일 새벽 의 수군 130여 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면서 공격했다. 군사력은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군 준사(俊沙)가 왜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왜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했고, 나머지 적선은 달아났다. 

    명량대첩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은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대첩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전 자체만을 놓고 전승의 요인을 분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량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서는 왜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의병전도 그만큼 활발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가까운 육상에서 전개된 연해 지역민의 항전이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명량대첩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가까운 연해지역에서는 영암전몽성·류장춘·박문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펼쳐지고 있었으며, 강진해남 일대에서도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대첩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인이 해역의 특성과 조류를 이용한 관방전술(關防戰術)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지휘관만의 전술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량에 최후방어선을 구축한 것부터 현지의 실정과 지리에 밝은 지역출신 인사들의 책략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해전의 전투요원들 대부분이 당해 연해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볼 때 누구보다도 현지 사정에 밝은 그들이 관방에 익숙해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회령포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군진을 옮겨 17일간 머물렀으니 전투준비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참여한 수군의 대부분은 전라우수영 관내, 특히 진도해남, 영암지역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향선을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른 우수영 관내 피난민들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량대첩은 자보의식(自保意識)으로 결집된 현지의 지역민들이 수군지휘부와 결합,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싸운 자전자수(自戰自守)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난선을 전선으로 활용, 피난민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함께 하였다는 점에서 향보성(鄕保性) 의병항전의 성격을 띤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디지털진도문화대전)
     

    DAUM지도스카뷰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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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이순신 - 명량해전 

    명량대첩축제 바로가기 :

     http://www.mldc.kr/home/www/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