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절로서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중 「스루」가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처음에는 절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지었다 한다.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10년(조선 광해군 2년)에 혜정 선사가 다시 지었으나 숙종 2년(1676)에 불에 타고 그 이듬해 또 절을 지었으나 영조 49년(1773년)에 화재를 당해, 영조 51년(1775년)에 혜암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일주문의 왼쪽에 부도밭이 있는데 소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못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글씨가 석자씩 세로 두줄로 씌어 있는데, 그 글씨가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같기도 하고 지리산 속에 부는 바람 같기도 하여 눈길을 끈다. 천은사의 본래 이름은 828년 인도 승려 스루 선사가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후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주문은 절의 귀중한 내력을 담고 있는 셈이다.(구례군청 자료)
이광사가 水體로 물 흐르듯 "智異山 泉隱寺" 글씨를 써서 水氣를 불어 넣은 일주문 현판
추사 김정희(노론)와 원교 이광사(소론)는 서로에게 비난하는 사이였다.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일주문 현판을 보고 혹평을 하고서는 이광사가 쓴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서체를 담은 새 현판을 달았다. 하지만 8년 뒤 김정희는 유배를 마치고 다시 천은사에 들러 이광사의 글씨가 더 훌륭하다”며 지금의 현판을 달게 했다.
창암 이삼만의 "보제루普濟樓"
천은사극락보전 (泉隱寺極樂寶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리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천은사는 지리산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인도 승려 덕운이 짓고,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라 하였다가 후에 천은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1592) 때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조선 숙종 4년(1678)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영조 50년(177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천은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불상 뒤로는 아미타불화가 그려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
극락보전에 걸린 주련 글씨는 일제 강점기 명필로 유명한 성당 김돈희의 중후한 예서풍의 작품도 특이하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전 앞에 보름달 같이 밝은 모습으로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금빛의 보배 빛살은 허공 비추니,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누군가 있어 명호를 일념 다해 부른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깜박할 사이 깨달아 무량 공덕 이루리라
원교 이광사의 "극락보전極樂寶殿"
천은사극락전아미타후불탱화 (泉隱寺極樂殿阿彌陀後佛幀畵.보물 제924호)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준다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후불탱화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불화를 그려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가로 277㎝, 세로 360㎝ 크기로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높은 연꽃대좌에 아미타불이 앉아있고 관음보살은 보병을, 대세지보살은 경전을 들고있다. 다른 보살들은 합장한 모습으로 조선 후기 불화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민머리에 망사같은 투명모자를 쓴 지장보살에서 고려 때부터 유행하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삼베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두껍게 채색을 해서 차분한 느낌을 준다. 영조 52년(1776)에 신암(信菴)을 비롯한 승려화가 14명이 그린 이 그림은 제작연대와 그림의 제목뿐 아니라 각 등장 인물들의 명칭이 적혀있어 아미타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천은사괘불탱 (泉隱寺掛佛幀.보물 제1340호)
구례천은사금동불감 (求禮 泉隱寺 金銅佛龕.보물 제1546호)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공간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셔진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43.3㎝ 높이의 금동불감으로 정면 전체를 여닫이식 문으로 구성하여 예배나 의식 때만 열어서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좌우 문 안쪽면에 칼을 든 인왕상이 1구씩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정면 벽에는 중앙에 비로자나삼존상과 주위에 10대 제자상을 돋을새김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전형적인 8각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다. 손은 양 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의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손모양이다. 얼굴이나 신체는 단아하며 대좌는 비교적 정교한 편이어서 격조 높은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좌우 벽에는 꽃무늬들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여러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입구 문을 열면 좌우에 금동불 2구가 모셔져 있는데,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엎어놓은 연꽃무늬로만 구성된 고려말 조선초의 전형적인 대좌 위에 앉은 같은 수법의 불상이다. 얼굴이나 신체는 단아하지만 다소 경직된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벽면에 돋을새김한 불상들은 비교적 얼굴의 형태나 옷주름의 묘사가 유연하고, 꽃무늬 같은 무늬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인왕상의 힘차고 발랄한 표현 등은 이 불감이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준다. 흔히 나옹화상의 원불(願佛)로 알려져 있으며, 불감 뒷면에 불상은 신승, 불감은 김치, 박어산 등이 만들었고, 박씨 부부가 시주하였으며, 신음 등 네 승려가 참여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어 흥미를 높여 주고 있다. 이 불감은 삼신불과 삼세불의 도상이 융합되어 도상적으로 매우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여말선초의 조각, 회화, 금속공예, 건축양식, 문양 등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에서 2008년 3월 보물로 승격지정되었다.(문화재청 자료)
구례 천은사 삼장탱화 (求禮 泉隱寺 三藏幀畵.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
삼장탱 (三藏幀) : 삼장탱은 하늘.땅.지하 三界를 제도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지지보살(地持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을 묘사한 불화입니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 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로 확대시켜 나간 것처럼 지옥계의 主尊인 지장보살을 확대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극락보전 아미타불상 뒤벽면에는 수월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응진전
팔상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부도밭
일제시대 명필로 유명한 성당 김돈희의 "첨성각瞻星閣"
근세 작가인 염제공의 "열선당說禪堂"
천은사 앞 저수지의 가을(천은저수지)
'전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영광군 법성포) (0) | 2012.09.22 |
---|---|
영광 불갑사 상사화(꽃무릇) 축제 (0) | 2012.09.22 |
연곡사(燕谷寺) (0) | 2012.04.08 |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순절비 (0) | 2012.04.08 |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求禮 燕谷寺 三層石塔) (0) | 201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