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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순절비

노촌魯村 2012. 4. 8. 21:22

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녹천 고광순 (鹿川 高光洵, 1848∼1907)

고광순은 헌종 14년(1848)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장흥 고씨(長興高氏)의 명문 후예이며,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고인후(高因厚) 부자의 혈손(血孫)으로 태어났다. 고광순과 함께 의진에 참여한 문중 인물은 고제량(高濟亮)과 고광훈(高光薰) 고광수(高光秀) 고광채(高光彩) 등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라도 지방에서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녹천(鹿川) 고광순·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등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일제를 몰아내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고광순이 참여한 광주의진에서는 대장 기우만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함께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광주에 결집된 호남의병은 관군의 탄압과 회유로 인해 와해되고 말았다.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고제량(高濟亮)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최익현은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함께 거사하여 순천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나 기우만 백낙구가 체포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광순은 좌절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이후 담양 창평으로 돌아온 고광순은 의병 재기에 힘을 쏟아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장정 5백여 명을 모아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다음과 같이 의진을 결성하였다.
의병장 고광순
부장(副將)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 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신덕균(申德均) 조동규(曺東奎)
이때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 의병장으로부터 연합작전의 연락을 받고 즉시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4월 25일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綾州,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서 윤영기(尹永淇) 등과 함께 화순읍으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일본군에 협력하는 자들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26일 다시 동복(同福,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으로 진군하였는데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들과 도마치(圖馬峙)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는 일시 흩어졌다. 이 무렵 고광순은 장기전에 대비해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9월 17일 화개동(花開洞)을 지나 지리산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잡은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가 유진(留陣)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고광순은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나갔다.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이 이 태극기에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리산이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변모해 가자 일제는 즉시 대탄압작전에 돌입하여 진해, 광주, 진주경찰서에서 출동한 군경을 지리산에 집결시켜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광순은 총력을 다해 고군분투하였으나 일제의 막강한 전력에 2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담양군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