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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상주

정기룡장군유적 (鄭起龍將軍遺蹟.충의사(忠毅祠))

노촌魯村 2012. 6. 16. 08:40

 

정기룡 장군(鄭起龍將軍)은 1562년(명종 17년) 경남 곤양에서 태어나 1586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봉사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승진, 우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 종군하여 거창싸움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어 상주판관에 부임해 왜군과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했으며 이후 회령부사, 상주목사, 통정대부를 역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왜군을 대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경주와 울산을 탈환했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영남지방의 왜군 잔당을 소탕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같은 전공으로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기룡’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육전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60여 회나 치르면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도 단 한 번 패한 적이 없었던 명장이었다. 50명의 기병으로 수천 명의 왜적을 격파한 적도 있으며 뛰어난 지략으로 겨우 400명 뿐인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 십만 명을 이틀 동안 꼼짝 못하게 하여 수십 만 백성들을 피난시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왜군이 쳐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한 경상도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것은 정기룡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서 적진에 돌격했으나 부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명나라 군과의 합동전투에서는 명나라 부총병(副摠兵)이 전사하자 장군의 지략과 용맹함에 감동한 명나라 군사들이 모두 정기룡 장군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하자 명나라 황제가 이를 허용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장군은 전리품인 수급은 휘하에 소속된 명나라 군사에 나누어 주거나 식량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큰 덕을 베풀어 인근에 흩어졌던 백성들이 장군이 주둔하던 상주로 모여들었고, 장군이 군사를 모집하면 모두 목숨을 던져 싸우겠다고 몰려들었다. 임란 후 1601년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오위도총부총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를 역임했으며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재직 중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상주 충렬사에 배향(현재는 충의사로 이전하여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전쟁기념관 자료)

 

정기룡장군유적 (鄭起龍將軍遺蹟.경상북도 기념물 제13호. 경북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345외 52필)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곤양 정씨의 시조인 정기룡(1562∼1622) 장군의 무덤가 있는 유적이다. 정기룡은 선조 19년(1586)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 등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호남을 지켰다. 그후 토왜대장,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이 유적은 1977년 정부의 호국선현유적정화사업계획에 따라 무덤과 그 주변을 깨끗이 하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와 유물관을 지은 것이다. 이곳에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이세재가 쓴 신도비가 있다.(문화재청 자료)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장군(將軍) 像

 

 

 

 

 

정기룡 유물 (鄭起龍 遺物.보물 제669호. 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84 상주박물관)            

정기룡 유물(鄭起龍 遺物)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매헌 정기룡(1562∼1622) 장군이 남긴 유물들이다. 정기룡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원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의 뜻을 따라 이름을 기룡으로 고쳤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의 벼슬로 거창싸움에서 왜적 500여명을 격파하고, 곤양의 성을 지키는 장이 되어서는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죽은 후에는 상주의 충렬사에 모셔졌고, 시호는 ‘충의’이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옥대 1개, 신패 1폭, 유서 1매, 교서 2축, 교지 1매 등이다. 이외에도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매헌실기』의 판목 58점과 그의 가족에게 내린 교지 9점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충의사에는 장군의 후손인 정기목씨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 84점이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청 자료)

 

 

 

 

 

 

 

 

 

 

 

 

 

                 

 

 

 

            

정기룡장군 묘소

정기룡장군 묘소

정기룡 장군 신도비(鄭起龍將軍神道碑)

금흔리에 있는 삼도통제사 정기룡 장군의 신도비. 금흔리 산45-1번지에 있다. 이수와 귀부(龜趺)를 갖춘 대형 비로 총 높이가 408cm이다. 비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81년에 세웠다. 비좌 높이 78cm×폭 180cm×길이 225cm이고, 이수는 높이 100cm×폭 128cm다. 비석의 전면 상부에는 ‘정공신도비명(鄭公神道碑銘)’이라 했다. :1비문은 해서체로 전. 후면 36행으로서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이세재가 글을 썼으며, 김수증이 새겼다. 비를 세운 연도는 숭정 기원 후 73년(1700, 숙종 26)이며, 비문에는 정기룡 장군의 행적과 임진왜란시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기룡장군유허지(鄭起龍將軍遺虛地.경남 문화재자료 제188호. 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

 정기룡장군유허지 (鄭起龍將軍遺虛地.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곤양 정씨의 시조인 매헌 정기룡(1562∼1622)이 태어나 젊은 시절에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다. 매헌은 선조 19년(1586)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봉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호남을 지켰다. 그후에는 토왜대장,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으며, 광해군 14년(1622)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매헌의 공훈을 추모하기 위해 1932년부터 경충사를 세워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경북 상주시에는 장군을 모신 사당과 무덤, 유물관이 있다. (문화재청 자료)

 

충의사.정기룡장군묘소 및 신도비.화달리삼층석탑.전 사벌왕릉 스카이뷰(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사진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