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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경산

경산 불굴사(慶山 佛窟寺)

노촌魯村 2012. 7. 10. 07:18

 

 

신문왕 10년(690) 옥희대사(玉熙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50여동의 건물과 12암자, 8대의 물레방아를 갖춘 큰절이었다. 영조 12년(1736) 큰비로 대파되자 송광사(松廣寺)에서 온 한 노승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종 11년 경신(1860)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939년 기묘 3월에 은해사 장경파백현(張鏡波伯鉉)이 중건하였다. 경내에 삼층석탑, 약사여래입상, 석등, 부도 등이 있다. 1988년 당시 주지인 원조(圓照) 스님이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어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였다.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 (慶山 佛窟寺 三層石塔.보물 제429호.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산55-9)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탑은 절 안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돌의 마무리에서 정연함을 보이고 있어 탑 전체적으로 뚜렷한 비례가 돋보이는 탑이다. 그러나 탑의 규모가 작아진 점이나, 지붕돌의 치켜올림이 지나치게 큰 점, 각 부분의 밑에 새긴 괴임돌의 표현을 강조한 점 등에서 형식적인 면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의 탑으로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문화재청 자료)

 

  

    

 

 

 

 

  

 

 불굴사석조입불상 (佛窟寺石造立佛像.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1호.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5)

이 불상은 땅 위에 있는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이다.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네모난 형태이며 각면에 안상을 새겨 놓았고, 윗단은 둥근 형태로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이 석불입상의 규모는 전체높이 233㎝, 어깨폭 75㎝, 머리높이 53㎝이다. 서 있는 모습의 이 불상은 머리부분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앞으로 향한 모습이나 왼손은 없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수리하여 보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자료)

  

   

 

 

 

 

 

    

      

 

 

 

 

홍주암

 

 

 

 

 

 

 

 

불굴사 경내에서 북동쪽 절벽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자연 동굴이 있고 입구 전면에 붉은 글씨로 「紅珠庵」이라 음각하였다. 굴 안에는 약수가 바위틈을 타고 내려와 모여 있는데 그 옆에 ‘我東第一藥水’의 刻字가 있다. 이 굴은 원효대사가 불굴사 건립 이전에 수도한 석굴이라 해서 ‘元曉庵’ 또는 ‘佛庵’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김유신 장군이 통일을 염원하여 이 석굴에서 기도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976년 석굴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 1점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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