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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 삼랑성(강화 三郞城) 및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

노촌魯村 2013. 6. 29. 12:22

 

남문 주차장에서 남문(종해루) 가는 길 

 

남문(종해루)

남문(종해루) 안쪽

남문(종해루)에서 동문 쪽으로의 성벽

강화 삼랑성(강화 三郞城.사적 제130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문화재청 자료)

동문

 

 

 

 

동문에서 남문 가는 길(250m)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이 비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극동함대 7척이 강화도를 침입하였을 때 (병인양요) 당시 순무 천총이던 양헌수(1816-1888)장군이 정족산성에서 강계포수 500여명을 매복 시켰다가 습격하여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종 10년(1873)에 건립 한 것이다. 양헌수 장군의 자는 경보, 본관은 남원으로 현종 4년(1838)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인양요시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 되었으며 이후 부총관, 금위등 중군을 거처 형조판서, 금위대장등을 역임하였다.
양헌수는 이 싸움으로 종2품의 한성우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는데, 이에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병마절도사로 근무하였다. 1872년에는 황해도 연안에 출몰한 해적을 체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운영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후 양헌수는 포도대장과 어영대장·금위대장 등 요직을 거치기도 했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했다. 그는 1882년에는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趙寧夏)·김병시(金炳始)·김기석(金箕錫)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승전비는 양헌수와 초관 17명, 경초군 121명, 표하군 38명, 포수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이하여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강화군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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