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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 전등사 대웅전(江華 傳燈寺 大雄殿)

노촌魯村 2013. 6. 29. 16:23

 

대조루에는 목은(牧隱) 이색의 시가(詩歌)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막신 산길 산길 끌며 청아한 맛 즐기는데

전등사의 늙은 스님 내 갈길을 알려준다

창틈으로 보인 뫼는 하늘가에 닿아있고

누각 아래 부는 긴 바람 물결되어 여울지네

별자리들 아득하게 왕 별 속에 파묻혔고

안개둘린 삼랑성에 자그맣게 보이누나

정화공주 발원 깃대 누가 다시 세워주랴

먼지 찌든 벽 글 보니 길손 가슴 아프구려

전등사대조루(傳燈寺對潮樓.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대조루에서는 저녁의 지는 해와 밀려오는 조수를 대할 수 있어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 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 ≪전등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이후 1749년에는 중수하는 과정에서 재목이 부족하자 상영(上營)에 요청하여 누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중수하면서 이 누각도 중건하였다. 경내 입구에 세운 누각으로 공포는 초익공(初翼工) 형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현재 대조루 내부에는 목어와 법고가 있고, 네 벽에는 현액과 1659년(현종 1) 향산(香山)에서 옮겨와 세웠다는 선원보각·장사각의 현판 1726년(영조 2)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썼다는 ‘취향당’ 현판 등이 가득 차 있다. 지금은 불교서적과 기념품 등의 판매점으로 사용되고 있다.(강화군청 자료)

 

전등사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강화 전등사 대웅전(江華 傳燈寺 大雄殿.보물 제178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온수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물로 전등사의 중심 예배공간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대웅전도 1621년에 지어졌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木板)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 등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출처:강화군청)

 

 

 



지붕 끝의 연봉


전등사 대웅보전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대웅보전 전면 향(向) 우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전면 향(向) 좌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후면 향(向) 우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전면 향(向) 좌측 추녀 아래 나부상

 

 

 

 

 

 

전등사대웅보전목조삼존불좌상

(傳燈寺大雄寶殿木造三尊佛坐像.인천  유형문화재  제42호)

전등사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으로서 주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좌측)와 아미타여래(우측)를 모신 삼세불좌상이다.
조선 광해군 15년(1623년)에 조성된 불상으로 얼굴과 신체, 의습 표현에서 드러나는 볼륨감과 생동감 있는 분위기, 뛰어난 조각솜씨가 돋보일 뿐 아니라 조성기(造成記)까지 갖추고 있어 17세기 전반의 조각양식과 조각승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보전 불단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전등사업경대(傳燈寺業鏡臺.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업경대는 망자의 죄업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 거울로 업경륜이라고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사자와 청색사자 1쌍으로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다. 규모는 높이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 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 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 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상호비교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보전 기둥에 새겨진 조선말의 병사 이름들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