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도생가(吳一島生家.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 1901~1946)이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조선 고종(高宗) 1년(1864)에 건축하였다.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호는 일도(一島)이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한가람 백사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1935년 2월에는 시전문지(詩專門誌) 『시원詩苑』을 창간하여 5호까지 출간하여 한국현대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김광섭(金光燮), 이헌구(李軒求) 등과 교유하였고 대표작으로는 「노변(爐邊)의 애가(哀歌)」,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등이 있다. 이 집은 크게는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되었다.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ㅁ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출처 : 영양군청)
오일도(吳一島)(1901∼1946) : 시인(詩人), 학자(學者), 지사(志士)
- 자 호:본명(本名)은 희병(熙秉), 아호(雅號)는 일도(一島)
- 생 애:1901-1946 오시준(吳時俊) 칠원현감(漆原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의 둘째 아들
- 활동사항:시원(詩苑) 창간(創刊), 시집 (오일도시(吳一島詩)), 산문집 (저녁놀)
1901년2월24일: 영양읍 감천리 출생
1908~14 :사숙에서 한학
1915년3월:한양조씨(시인 조지훈마을) 조필연 16세와 결혼 영양 보통학교 입학
1918년 :경성 제일 보통학교 입학
1923년:입교대학 철학부 입학
1925년:조선문단 4월호에 "시" 한가람 백사장 발표 등단
1929년 :입교대학 철학부 졸업
1930년;대중공론 5호에서 "시' 꺼졌다 밝았다 "발표
1932년:근화학교 (덧성여중고 전신) 1년간 교사
1935년:동광33호 34호에서"시" 꽃에 물주는뜻,새해아침,물의유혹"발표
2월에 시문학지 (시원) 창간 "시" 노변의 애가 발표
4월에 시원 2호 발행 "시" 눈이여 나려다오 ,창을 남쪽으로" 발표
1936년 :시원사에서 "을해 명시선집 발행,여기에"5월의 화단" 수록
1938년: 1월 자기본인의 시집은 없지만 조지훈의 형 세림시집 간행(유고시집)
1942년;영양 감천으로 낙향 과정기(오이집) 수필등을 씀
1945년 :8.15 해방후 서울 상경
가을부터 병세가 악화되여 시,역시,수필,한시등을 정리하여 초교본 한권을 주며
장조카 용옥에게 시집 발간 부탁 시집제목을 마지막 시작인 저녁놀로 정했다
1946년2월 28일 간경화로 장자택에서 사망(미아리 묘지에 안장)
1961년: 남양주 도농리 가족묘지로 이장
건물에는 `菊雲軒'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菊雲軒'이라. 국화와 구름의 집
吾家大路邊 나의 집은 한길 가
朝暮車連綿 아침 저녁으로 수레가 잇닫는다.
送送淚何盡 보내고 또 보내는 눈물 어이 끝나리.
歸期問杳然 언제 돌아오나 물으면 대답은 아득할 뿐
(징용차를 보내며(送徵用車))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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