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뒤에 울산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
충의당(忠義堂.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이 살았던 곳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된다.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경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집의 구성은 정면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뒷면에 정침과 광채 그리고 흠흠당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제향공간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배치방법을 지니고 있다.
인근에는 선생을 추모하여 정려비각을 세우고 용산서원에 배향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비석의 앞면에는 老者誰不能戰獨不能死耶(노자수불능전독불능사야)라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라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병자일기에 있는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용인 흠천전투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귀가(歸家)하라 명했다. 이 때 환갑을 넘긴 종들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不遷位)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종가에는 충노비(忠奴碑)와 비각(碑閣)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정무공 잠와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으셨다는 노거수는 회나무로 일제강점기와 6.25 당시 한 때 고사 했다가 다시 소생한 나무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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