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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 속내를 드러내다

노촌魯村 2013. 12. 3. 22:49

 

경주 명활성 속내를 드러내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계림문화재연구원(원장 남시진)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2013.6.25.~11.30.)를 한 경주 명활성(慶州 明活城, 사적 제47호) 북문지 발굴유적에 관한 현장설명회를 오는 3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하였다.

 

명활성의 북문지(北門址)로 추정되는 곳에서 문지(門址), 치성(雉城, 성곽 일부를 돌출시켜 놓은 것), 문지로 진입하기 위한 석축 구조물 등이 최초로 조사되었으며,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의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사적 제235호)과 경상북도의 문경 고모산성(聞慶 姑母山城)에서 확인된 바 있다.

 

북문지의 양쪽 측벽에서는 다량의 평기와와 철판(鐵板), 철정(鐵釘, 쇠못) 등 당시 나무문에 사용되었던 철제유물이 정형성 있게 출토되었고, 특히, 문지의 동서 끝단에서는 확쇠(나무 기둥을 바닥과 고정시키는 철기)가 출토되어 그 너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번 조사 성과는 명활성 문지의 실체와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이 신라 외곽지역 이외에 신라왕경인 경주에서 최초 확인된 점에서 학술 가치가 매우 크며, 이는 앞으로 경주 명활성 정비에 있어 중요한 기초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경주 명활성은 삼국사기에 실성왕(實聖王) 4년(405년)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8년(475년)부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10년(488년)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 선덕왕(善德王) 16년(647년)에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군들이 반역을 도모한 근거지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왕경(新羅王京)에서 지리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발굴조사 완료 후 전경1(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발굴조사 완료 후 전경2(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동쪽 체성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북문지 주변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석축 구조물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치성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북문지 서측벽 철제유물 출토 상태(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성 북문지 출토 확쇠(사진출처:문화재청)

 

 

 

 

명활산성(明活山城.사적  제47호.경북 경주시  천군동, 보문동  )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선덕여왕 때는 비담(毗曇)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하기도 했으며,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큰 몫을 한 곳이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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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자료사진)

 (문화재청 자료사진) 

 명활산성작성비

 

명활산성 항공사진(경주시청 자료.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이 ...)    

 명활산성 일정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