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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벽루(涵碧樓)

노촌魯村 2014. 5. 7. 23:16

 

함벽루(涵碧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경남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80)  

합천 8경중 제5경인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서기 1321년)에 합주 지군 김모(金某)가 창건하였으며, 수차에 걸쳐 중건하였다. 대야성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볼 수 있게 지어져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으로 걸려 있고, 뒤 암벽에 각자한 "함벽루"는 송시열의 글씨이다. 함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 5량구조, 팔작지붕 목조와 가로 누각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하다(출처:합천군청)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암벽에 각자한 "함벽루"는 송시열의 글씨이다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 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합천 남쪽 황강가에 있는 함벽루에서 읊은 시인데 마음을 비우는 공부에 대해서 읊고 있다.

 

* 남곽자 : 노자에 나오는 세상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

함벽루 걸린 남명 조식선생의 시

 

합천군수이증영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7호)

이 비는 합천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이증영(?∼156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조선 명종 14년(1559)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을 지은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고, 글씨는 고산 황기로(1521∼1567)가 썼다.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 의 형식을 지녔으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1554년에서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냈던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 이증영은 황기로와 함께 조선 중종 29년(153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당시 그의 사부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친 뒤 합천군수를 지내게 되었다. 그 뒤 1563년 청주목사 재직 중에 죽었다.
고산 황기로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그의 글씨 가운데 초서는 여러 점 있지만, 해서의 경우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 완성된 작품으로는 이 비석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글을 지은 남명 조식은 경의사상(敬義思想)에 입각해 살았던 사람이므로, 비문의 내용 또한 신빙할 만하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출처:문화재청)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시도기념물 제133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2)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울 둘러 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진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다. 또한,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연호사

삼국시대 신라의 대야성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진 연호사는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신라 장병 2천여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 백제군 일만 대군이 642년 공격을 했다.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패전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항복할 것을 거절하고 싸우게 된다. 여기서 김품석은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 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데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 하리오”라며 장병 2,000여 명과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때 죽은 김품석과 처자, 그리고 신라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643년 와우 선사가 절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연호사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극락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의 전각이 있다
연호사 밑에는 푸름이 젖어드는 곳이라는 하여 지어진 함벽루(涵碧樓)라는 누각이 있다. 함벽루는 핏빛의 역사와는 다르게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함벽루는 진주 촉석루나 밀양 영남루보다 더 오래된 정자로 누각 처마의 빗물이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게끔 지어져 누마루에 앉으며 배를 타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출처:합천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