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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신라 충신 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및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

노촌魯村 2014. 5. 7. 19:27

 

신라 충신 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9)

신라 선덕여왕 때에 활동했던 충신 죽죽(?∼642)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죽죽은 대야주(지금의 합천) 사람으로, 선덕여왕 11년(642)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 대나무와 같은 절개로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전사 하였다. 그 후 선덕여왕은 그의 용맹성과 나라를 위한 충절을 기리고자 급찬으로 벼슬을 높여 주었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단순한 형태로 ‘신라충신 죽죽지비(新羅忠臣 竹竹之碑)’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 안에 서 있다.
조선 중종 20년(1525) 군수 조희인이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비를 세웠으며, 한사 강대수가 비문을 지었다(출처:문화재청)

 

 

 

 신라 충신 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옆의 삼일운동기념비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

사진 출처: 문화재청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시도기념물 제133호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2)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울 둘러 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진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다. 또한,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김품석(金品釋, ?~642년)은 고타소공주의 남편으로, 김춘추(훗날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다. 김품석은 벼슬이 이찬에 올라 대야성의 도독으로 부임한 뒤 부하인 검일의 아내를 빼앗아 원한을 샀다. 642년에  백제의 장군  윤충이 군사를 이끌고와 대야성을 포위했다. 그때 검일이 백제군에 항복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니 민심이 흉흉해져 성을 지킬 자신감을 잃었다. 보좌관인 서천이 항복할 것을 권유하여 성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화랑 죽죽이 만류했다. 그는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백제의 복병은 이들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처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결국 대야성은 함락당하고 윤충은 그의 목을 베어 사비에 보냈다. 김품석의 유골은 647년 김유신장군이 대야성 설욕전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교환되어 비로소 신라로 돌아왔다.(출처:위키백과)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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