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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상도 개도 700주년 기념 특별전-제3부 경상감영 2기(성주.달성.안동 시기 1593-1601)

노촌魯村 2014. 7. 25. 17:47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과 상주박물관(관장 전옥연)은 경상도慶尙道 개도開道 7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경상북도, 1314~1896’을 개최합니다.
2014년은 경상도慶尙道라는 도명道名이 사용된 지 7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경상도라는 도명의 유래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과 상주박물관은 이 해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특별전을 공동 기획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경상도 지역은 분지 속의 분지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곳입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경상도 사람들은 과거부터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신라가 그러했고,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경상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동경東京’이라 불리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조선인재朝鮮人才 반재영남半在嶺南’이라 기록될 정도로 성리학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경상북도 지역은 경상도라는 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 이래 경상좌도(낙동강의 동쪽)와 경상우도(낙동강의 서쪽)를 대표하는 고을이 위치해 있었던 곳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상주박물관은 이 점에 주목하여 도道의 이름이 정해진 1314년부터 남․북도로 분리된 1896년까지의 시기 동안, 경상북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을 재조명해 보려 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환경, 인물, 사건, 이야기 등 경상북도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화재 170여 점이 선보입니다. <경상도의 등장>, <경상 감영 Ⅰ기(경주, 상주 시기)>, <경상 감영 Ⅱ기(성주, 달성, 안동 시기)>, <경상 감영 Ⅲ기(대구 시기)> 등 모두 4개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됩니다.
특히 <조선고지도(보물 제1538호)>, <이의성필 하외도>,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쓴 <임난일기(보물 제1003호)>,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이색 초상>, <정몽주 초상>, <정경세 금관> 등은 눈여겨 볼 만합니다.
이번 전시가 경상북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정서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 2014년 7월 22일부터 9월 14일

               

(상주박물관) : 2014년 10월 21일부터 12월 29일

 

 

 

 

 

 

 

 

 

 

류성룡필 진시무차 초고(柳成龍筆 陳時務箚 草稿.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1호. 유엔평화로 63 부산박물관 유엔평화로 63 부산박물관 )

이 작품은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국가의 시무(時務)에 대하여 올린 차자(箚子 조선시대 관료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의 초안이다. 1633년(인조 11)에 간행된 『서애집(西厓集, 서애선생문집)』 권5, 차(箚), 「진시무차(陳時務箚) 임진 11월 재정주(壬辰十一月 在定州)」의 초고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이 차자는 세로로 116행의 초서(반초서)로 쓰여 있으며, 가로로 9장의 한지를 이은 두루마리 형태로, 첫째 장은 앞부분이 잘렸고, 아홉째 장은 끝 부분의 배면 글씨가 잘렸다. 다섯 째, 여섯 째 장은 길이가 다른 장에 비해 좁고 다른 지질에 전후의 묵적과 다르게 갈필(渴筆)로 되어 있어, 수정 가필함에 따라 다시 써서 이은 것으로 짐작된다.
내용은 국가의 위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인심이므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즉시 상을 주도록 하는 등 흩어진 민심을 규합할 세부 계획과 강원도 산척(山尺, 사냥이나 약초 캐는 자)을 복병으로 활용하여 왜적 북로(北路)군의 수미(首尾)를 절단시킬 것, 경성 수복의 계책, 풍년을 맞은 호남의 곡식을 영남으로 옮겨 백성을 구제할 것 등을 비롯하여 변방의 보고를 즉시 처리해 시사(時事)에 만전을 기하고 게릴라전을 활용할 것 등이 중심이다.
『서애집』에 실린 「진시무차(陳時務箚)」와 이 초고는 경기감사 최원(崔遠)의 실행(失行), 함흥의 적을 소탕하는 일, 송언신(宋言愼)의 교체 관계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초고 작성 후에 발생한 변동 사항을 첨가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 관련 기본 사료로서 주목할 만한 자료이며, 임진왜란 당시 위정자의 시국관과 극난극복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서애집』에 최종적으로 수록된 「진시무차」와는 상당 부분이 동일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양자 간에 서로 첨삭된 부분이 있어 초고가 가지는 고문서로서의 가치도 뛰어날 뿐 아니라, 이 초고는 현존하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도 그 자료적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정기룡 유물(鄭起龍 遺物.보물  제669호. 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84 상주박물관 )

정기룡 유물(鄭起龍 遺物)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매헌 정기룡(1562∼1622) 장군이 남긴 유물들이다.
정기룡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원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의 뜻을 따라 이름을 기룡으로 고쳤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의 벼슬로 거창싸움에서 왜적 500여명을 격파하고, 곤양의 성을 지키는 장이 되어서는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죽은 후에는 상주의 충렬사에 모셔졌고, 시호는 ‘충의’이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옥대 1개, 신패 1폭, 유서 1매, 교서 2축, 교지 1매 등이다. 이외에도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매헌실기』의 판목 58점과 그의 가족에게 내린 교지 9점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최문병 의병장 안장(崔文炳 義兵將 鞍裝.보물  제747호.경북 경산시 박물관로 46, 경산시립박물관 (사동))

최문병 의병장 안장(崔文炳 義兵將 鞍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문병이 사용한 말안장으로 크기는 56×39×34㎝이고, 안장(鞍裝)자리 크기는 105×26㎝이다.
안장의 앞뒤로 돌출된 부분인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았고, 뼈를 이용해 안장가리개(복륜)를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켰다. 안교 바깥쪽은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뼈조각으로 꽃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 아래쪽은 둥글게 파내고 테두리를 뼈조각들로 붙였다.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다. 발걸이(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원형으로 되었으며 배띠와 고들개는 마(麻)와 면직물로 되어 있다.
이 안장은 등자·배띠·고들개 등의 부속구를 모두 갖추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희귀한 말갖춤(마구)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출처:문화재청)

 

 

삼안총(三眼銃.보물  제884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삼안총은 개인이 휴대할 수 있게 만든 작은 규모의 총이다. 한손잡이에 3개의 총신을 연결시켜 한번에 3발을 쏠수 있는 것으로, ‘삼혈총(三穴銃)’이라 부르기도 한다.
총길이 38.2㎝, 총신 26㎝, 손잡이 12.2㎝, 구경 1.3㎝로, 주로 살상용이지만 신호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손잡이 부분에 선조 6년(1594)이란 제작연대와 화약과 실탄 용량, 제작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채용신이 그린 ‘대한제국동가도’에서도 가장 앞줄에 말탄 기병이 삼안총을 높이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삼안총은 몇 점 남아 있지만, 이것은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보존 상태도 좋아 화포사 연구는 물론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도 매우 소중한 유물이다.(출처:문화재청)

 

 

  

 

 

 

 

 

 

 

조정 임진란기록 일괄(趙靖 壬辰亂記錄 一括.보물  제1003호.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84, 상주박물관 (삼덕리))

조선 선조∼인조 때의 학자이며 관료인 조정(1555∼1636)이 임진왜란 당시에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손수 적은 일기이다. 조정은 김성일과 정구의 문인이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고, 선조 29년(1596)에 도체찰사였던 이원익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선조 36년(1599)에는 사마시에, 2년 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대구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죽은 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것은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0년(1597)까지 약 6년간의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임난일기는 6종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목록은 『임진일기』 2책, 『남행록』 1책, 『진사록 』1책, 『일기 부 잡록』 1책, 『서행일기』 1책, 『문견록』 1책이다. 기술형식은 월일별로 행을 구분하여 기술하였으나 간혹 기사가 없는 날에는 날씨만 기록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러 사람이 손수 적은 수십 건이 있으나, 조정의 『임진일기』는 임진년 10일 정도의 기록이 빠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약 6년간의 기록이 다른 어떤 것보다 충실하고 상세하다. 이는 당시 사회상과 군대의 배치상황, 의병의 활동상 등을 살필 수 있는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