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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돈암서원(論山 遁岩書院)

노촌魯村 2015. 8. 24. 21:30

 

 

논산 돈암서원(論山 遁岩書院.사적  제383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외 5필지 )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출처 : 문화재청)

돈암서원은 사계선생께서 세상을 떠난후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건립한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내려오다가 사당앞에 강당을 세우고 선생의 학문을 배우며 서로 뜻을 이어 내려 왔다 하며 그 당시에는 현재의 임리1구(숲말) 249번지에 있었는데 원우(院宇)서북쪽에 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 서원의 이름을 돈암(遯巖)이라 하였다 한다. 돈암서원에는 본전이라하여 네분의 위패를 모신 12칸의 건물이 있고, 양성당 10칸, 응도당이라 하여 유생을 가리치던 큰강당이 24칸이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사계 신독재 선생의 전서판목(전서판목)을 보관하던 곳으로 12칸, 사계선생의 도덕을 상징하여 만든 산앙루(山仰樓) 누각이 있고, 정회당은 8칸의 건물로 유생들의 휴식소였으며 내삼문은 3칸으로 본전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외삼문은 3칸으로 본 서원의 정문이다. 이곳의 건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이곳의 한옥을 본따 용인민속촌에도 똑같은 건물을 지었다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대가 얕아 장마철에는 홍수가 뜰에까지 넘쳐들어 1881년(고종18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 지었다.그 당시 응도당은 구조가 오랜 고대 가옥제도를 본따서 지어 너무 웅장하고 크고 넓고 하여 옮겨 짓기가 어려워 사당앞에 모형적으로 세운 것이 현재의 강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양성당은 사계 선생께서 건립하신 작은 강당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허가 되어 없어지고 강당 이름만 전해 내려온 것으로 이름없는 빈강당에 액자만 걸어 놓았던 것인데 이 강당도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옛모습을 나타내고 있다.이 서원에는 조선왕조로부터 하사받은 자색의 큰 벼루가 있는데 포도의 조각이 되어 있고 모양이 우아하며 제사때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서원은 선현봉사와 자제교육에 목적이 있는데 후세에는 유림들의 당쟁 등 세력확장의 중심지로 되어가 대원군때에는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600여개소의 서원을 모두 철폐하였다
이때에 논산에 있던 서원중 철폐되지 않고 남아있던 서원은 연산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뿐이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년)에 창건하였으며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사계 김장생선생을 주향으로 하고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선생 네분을 모시고 (음) 3월, 8월에 문묘석존의례에 따라 제향하고 있다(출처 : 논산시청)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보물  제1569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2번지)

선현께 제사지내고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으로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김장생(1548∼1631)을 중심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돈암서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위패를 모신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의 행적 및 사원의 구조 등에 관해 적고 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지방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도 폐지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김집·송준길·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함께 모셔두어 매년 2월·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현종 10년(1699)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몸 앞면에 전서체로 새긴 비의 제목은 김만기의 글씨이다.(출처 : 문화재청) 

 

 

 

 

 

 

 

 

 

 

 

 

 

 

 

 

 

 

 

 

 

김장생(金長生 1548(명종 3.서울) - 1631(인조 9)) :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이다. 그의 예학론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을 바르게 하는 것'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을 계승하여 일원적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출처 :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