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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1)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 2015-07-21 ~ 2015-11-01 -

노촌魯村 2015. 9. 7. 22:40

 

이 전시회는 국립경주박물관의 개관 70주년 기념전이자, “실크로드 경주 2015”의 선도적 테마 행사입니다. 신라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국내 특별전으로서는 처음인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사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황금문화’, ‘능묘’, ‘대외교류’, ‘왕경’, ‘불국토’ 등의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부별 전시품으로서 금관총(金冠塚) 금관 등 국가지정문화재 22건 30점을 포함한 600여 점의 다양한 신라 문화재가 선보이며,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최초로 경주에 전시됩니다(단, 2주간만 전시: 7.21.~8.2.).

제1부. 황금문화
오늘날의 시각적 표상으로서 신라가 부각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부터였습니다. 근대적 학문인 실증적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신라문화가 재조명되며 ‘문화재’라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 사례는 1921년 금관의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총에서 금관을 비롯해 처음 보는 신라의 황금 유물들이 세상에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이미지는 인쇄술과 사진의 발달로 인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금관총 금관을 비롯하여 경주 보문동합장분 출토 금귀걸이, 경주 노서동 출토 금목걸이 등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신라 황금문화재를 예로 들어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봅니다.

제2부. 능묘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시작한 신라능묘의 발굴은 197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집중적으로 조명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의 지시로 1973년부터 경주고도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한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들이 발굴되는 등 신라문화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성과는 1974년 10월 대릉원의 개원 그리고 1975년 7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축 개관과 함께 공개되면서, 신라 왕릉의 실체와 의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광복 이후 신라능묘 출토품과 금제 관식, 은제 관모 등 천마총·황남대총의 화려하고 다양한 부장품을 전시합니다.

제3부. 대외교류
1970년대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마립간 시기의 각종 금제품과 돌무지덧널무덤의 연원을 북방 초원지대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당(唐), 중앙아시아, 인도에까지 구법승(求法僧)이 오갔던 신라 통일기의 국제적 성격 등도 거론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라문화 연구의 다각화와 함께 그 범위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림로 14호묘 보검, 황남대총의 봉수형 유리병, 식리총 식리 등을 전시합니다. 또한, 신라 통일기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경주고등학교 소장의 무인석상이 처음으로 박물관 전시에 선보입니다.

제4부. 왕경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 발굴이 일단락된 뒤, 신라 왕경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월지(안압지)와 황룡사터 등의 대형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생활 유적들도 조사되어 왕경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촉발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월성 내부의 발굴, 일제강점기에 부실하게 수습되었던 금관총의 발굴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월지의 용얼굴무늬 기와와 보상화무늬 전, 황룡사터의 각종 공예품, 경주박물관 남쪽 부지에서 나온 ‘東宮衙’가 새겨진 단지 등이 전시됩니다.

제5부. 불국토
불교미술품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불상의 복장품이나 불탑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5부에서는 신라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교공예품들이 전시됩니다.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경주에서 처음으로 전시됩니다(전시 기간 7.21.~8.2.). 이밖에 경주 구황동 석탑의 국보 제79호 금제 아미타불좌상(전시기간 8.4.~11.1.), 사천왕사터 출토 ‘東塔西’가 새겨진 금동 장식, 경주경찰서 소장의 부처가 새겨진 탑신석(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등도 주목되는 작품입니다. 이밖에 ‘신라’를 소재로 한 한 이응노, 박대성, 배병우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될 예정입니다.

마무리. 신라의 현재적 의의
이 전시를 마무리하며 신라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신라’라는 국호에 주목합니다. 주지하듯 제22대 지증왕(재위 500~514) 때 확정된 ‘新羅’는 ‘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덕업일신’은 바로 변화와 개혁 또는 혁신이며, ‘망라사방’은 세계화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에 다름 아닙니다. 이처럼 ‘신라’는 오늘날에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라’의 현재적 의의일 것입니다. 개관 70주년과 ‘실크로드 경주 2015’를 맞이하여 개최하는 이 특별전이 ‘신라’를 바탕으로 21세기 우리 문화를 융성케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慶州 夫婦塚 金製耳飾.국보  제90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보문동의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한쌍의 금귀걸이로, 길이 8.7cm이다. 태환이식이란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를 말한다.
귀걸이의 몸체가 되는 커다랗고 둥근 고리에 타원형의 중간고리가 연결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뭇잎 모양의 화려한 장식들이 매달려 있다. 커다란 둥근 고리에는 거북등무늬와 같이 육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4엽 혹은 3엽의 꽃을 표현하였는데, 꽃 하나하나에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을 이용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밑부분에는 나뭇잎 모양의 작은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달고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모양을 달았다.
신라 귀걸이 장식에는 대부분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누금세공법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태환을 비롯한 전체 장식에 누금세공법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화려하고 놀라운 세공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金冠塚 金冠 및 金製冠飾.국보  제87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금관총 금제 허리띠(金冠塚 金製銙帶.국보  제88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 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금관총 과대 및 요패는 무늬를 뚫어서 조각한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慶州 路西洞 金製頸飾.보물  제456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慶州 路西洞 金製頸飾)는 금소환(金小環) 여러 개를 연결하여 속이 빈 구형(球形)을 만들고 심엽형(心葉形) 금판을 금줄로 연결하여 장식한 것을 44개 연결하고 끝에 비취 곡옥(曲玉) 1개를 달았다.
가운데가 빈 구형(球形)의 구슬은 같은 시대 귀걸이의 중간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고 목걸이 끝에 곡옥(曲玉)을 다는 형식은 당대 목걸이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목걸이가 대부분 유리제 청옥(靑玉)을 연결하고 끝에 곡옥(曲玉)을 다는 형식이었으나 이 목걸이는 청옥(靑玉)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슬 하나하나에 기교를 다하는 등 당대 목걸이로서는 최대의 걸작이다.
끝에 달린 비취 곡옥(曲玉)의 맑은 색은 금색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목걸이는 경주 노서동 215호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찍이 이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일련의 유물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의하여 1966년에 반환된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출처 : 문화재청)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皇南大塚南墳 金製頸飾.국보  제194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길이 33.2㎝의 금 목걸이이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이 표주박 형태로 붙어 있는데, 남쪽 무덤에서 사람의 목에 걸린 채로 널(관) 안에서 발견되었다.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 사슬 4줄과 속이 빈 금 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굽은 옥을 달았다. 경주지역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굽은 옥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皇南大塚南墳 銀製肱甲.보물  제632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皇南大塚南墳 銀製肱甲)는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팔뚝가리개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팔뚝가리개는 남쪽 무덤 널(관) 밖 머리쪽의 껴묻거리 구덩이(부장갱)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35㎝이다.(출처 : 문화재청)

 

 

 

 

 

 

 

 

 

천마총 금제 관식(天馬塚 金製冠飾.보물  제617호: 사진에서 아래 쪽 금제관식.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금제 관식(天馬塚 金製冠飾)은 널<관(棺)> 밖 머리쪽에 껴묻거리(부장품)가 들어있는 상자 뚜껑 위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23㎝, 너비 23㎝인 이 관식은 중앙에 새머리같이 생긴 둥근부분이 있고, 그 밑 좌우 어깨 위치에는 위로 솟는 날개 모양의 한 쌍이 있다.
몸체는 수직으로 내려오다 조금씩 좁아지면서 끝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머리부분에는 나뭇잎 모양으로 2개의 구멍을 뚫었고, 좌우 날개에서 몸통부분까지 5개의 구멍을 나뭇잎 모양으로 뚫었다. 아래의 방패형으로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지만, 그 윗부분에는 약 150개의 원형 장식을 한 줄에 연결해서 달았다.
전체를 세로로 반으로 접었던 흔적이 있으며, 밑에는 못 구멍이 하나 나있어 어떠한 형태로 쓰였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출처 : 문화재청)

 

천마총 금제 관식(天馬塚 金製冠飾보물  제618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금제 관식(天馬塚 金製冠飾)은 천마총 안의 널<관(棺)> 머리쪽에 있던 유물 보관함에서 발견된 것으로 큰 새의 날개가 펼쳐 있는 모양이고, 밑은 방패 모양으로 된 장식이 달려있다. 몸체와 좌우의 날개에는 덩굴무늬를 파 놓았는데, 가장자리의 테두리와 줄기부분에는 세밀하게 점선을 찍어, 얇고 긴 금판이 힘을 받도록 했다.
표면 전면에는 지름 0.7㎝정도의 원판을 400여개 정도 금실로 연결하여 매우 화려해 보인다. 밑에는 장식이 전혀 없고 밑이 둥근 돌기부가 있고, 못 구멍이 하나 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에 고정시켰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노서동 금팔찌(慶州 路西洞 金製釧.보물  제454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노서동 금팔찌(慶州 路西洞 金製釧)는 경주 노서동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지름 8㎝의 신라의 금제 팔찌이다.
납작한 단면 바깥쪽에 각각 59개씩의 돌기를 내어 하나하나에 옥을 상감하였다. 이 돌기 좌우에는 4마리 용이 입을 벌려, 서로 다른 용의 꼬리를 물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겼다. 몸에는 비늘을 세밀하게 조각하였고 눈은 음각하였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무덤에서는 각종 금제나 금동제 팔찌가 발견되는데, 장식이 없거나 간단한 문양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같이 용이 조각된 예는 매우 드물며, 그 중에서도 이 팔찌는 뛰어난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