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주/경주인근자료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3)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 2015-07-21 ~ 2015-11-01 -

노촌魯村 2015. 9. 8. 07:09

 

 

 

 

 

 

 

 

 

 

 

 

 

 

 

 

 

 

 

 

 

 

 

 

 

 

 

 

 

 

귀부머리(사천왕사지. 서쪽 귀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보물  제366호.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는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터에 있는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감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이다.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사각형의 깊숙한 상자에 완만한 원뿔모양의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 높이가 약 31㎝정도 된다. 사리감의 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이 1구씩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에는 각각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다. 주위는 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모두 동판에 따로 새겨 작은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무늬로 가득 메운 가는 장식판을 이용해 단을 돌렸는데, 뚜껑의 둘레에도 마찬가지로 단을 돌렸다.
네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은 그 자세나 옷의 무늬가 중국 당나라의 조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앙 아시아의 조각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그리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의 3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목조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 사리기의 기단과 몸체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그 윗부분인 보개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다.
사리기의 기단은 안상을 새기고 신장상을 배치하였으며, 기둥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단의 맨 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안에 4개의 주악상과 4개 동자상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사리병은 고리가 달린 그릇모양의 외피속에 넣고, 그 위에는 수정으로 만든 보주를 올려 놓았다.
감은사터의 사리장치는 오랜 세월에 많이 부식되어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각 부분에 나타난 섬세하고 조각이 아름다운 중요한 문화재이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출토 사리함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제39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원리

 이 탑은 이중의 기단을 갖춘 석탑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함께 붙여서 만들었고 각면에는 우주와 탱주 3개씩이 있으며, 갑석 상면에는 전형적인 2단의 괴임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2개씩이 있으며, 갑석 상면에는 모진 2단의 받침이 뚜렷하다. 탑신부는 �층 옥신만 각면 1매씩의 판석으로 짜고, 그 위의 옥신선과 옥개석은 모두 한 장씩의 돌로 짜여져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만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의 거탑이며 정연한 결구와 자신 있는 조법, 석재의 순백한 색조 등이 주위의 환경과 잘 조화되어 그 모습이 당당하다. 이 석탑이 속해 있던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경주의 석탑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인 8세기경의 건립으로 추정된다.(문화재안내문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국보  제79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보물  제328호.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높이 29㎝의 자그마한 금동불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없어졌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약사여래입상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의미를 지닌 부처로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특징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풍만한 얼굴은 미소없이 근엄한 인상이며 눈· 코·입의 선이 명확하고 치밀하여 세련된 조각미가 느껴진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지그재그형 옷주름과 U자형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는 두껍게 축 늘어진 옷으로 인해 다소 둔중해진 듯 하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를 맞대고 있고, 왼손에는 약항아리를 들고 있다. 대좌는 없지만 불상을 대좌에 꽂았던 뾰족한 촉이 두 발 밑에 하나씩 남아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주조할 때 뚫은 구멍 자국이 남아 있다.
높다란 머리묶음과 얼굴 표정 등이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비슷하여 8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금동불두(8세기.경주시 양북면)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