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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서산서원(西山書院)

노촌魯村 2016. 3. 5. 08:35




서산서원(西山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 1706년(숙종 32) 지방유림의 공의로 생육신인 조려(趙旅)·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에 ‘西山(서산)’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4년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협력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문(外門), 육각정(六角亭), 3칸의 고사(庫舍)와 육각비(六角碑), 조려의 행적비 등이 있다. 묘우에는 조려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원호·김시습·이맹전·성담수·남효온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거나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는 곳이며, 고사는 제구(祭具)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4,000평, 임야 100정보, 대지 1,000평 등이 있다


조려(趙旅, 1420-1487)는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 은자(漁溪隱者). 공조전서 조열(趙悅)의 손자, 증 사복시정 조안(趙安)의 아들. 1453에 진사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숨어 살았다. 본관은 함안(咸安). 경남 함안군 출생.


생육신(生六臣) : 사육신에 비교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킨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유정난에 의한 세조의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하여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단종 복위운동으로 나타났다.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이 때 죽음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 불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1698년 단종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 참판에 증직되시고 1703년 경상도 유생 郭抑齡(곽억령)등이 成三問(성삼문),朴彭年(박팽년)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건의하였던 바, 1706년에 평소 기거하시던 백이산 밑 원북동에 祠宇(사우)를 세워 金時習(김시습),李孟專(이맹전),元昊(원호),南孝溫(남효온),成聃壽(성담수)와 함께 제향 하니 이곳이 西山書院(서산서원)이다.




육각비(六角碑)



조려의 행적비


충의사(忠義祠)



충의사(忠義祠)의 생육신 위패


西山書院 重建記

嶺南咸安朝鮮 端宗臣下로서 節義를 지켰던 漁溪 趙旅先生故鄕이다. 世稱 先生 李耕隱 元觀瀾 金梅月 成文斗 南秋江 여섯 君子生六臣이라한다. 대개 이 六 先生은 자취는 비록 달랐어도 마음은 같았으므로, 後人六 先生詩文을 모아 刊行하는 데에도 꼭 함께 聯集하였고, 行蹟敍述하여 編纂함에도 꼭 같이 列傳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高風思慕하고 芳躅을 가꾸어 을 세워 神主奉安하여 함께 醊享치 않을 수 없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西山書院創建케 된 것이다.

書院創建肅宗 癸未年이고 賜額西山書院이다. 書院쪽에 伯夷山이 있다고 한다. 高宗 戊辰年에 이르러 書院毁撤되고 書堂에서 薇薦奉享해 왔는데, 士林齎恨後孫의 음울이 오랫동안 이었다. 지난 庚申年漁溪先生後孫들이 書院復元코자 誠金을 모으기로 하였는데, 日本에 있는 盛濟氏를 비롯하여 特贊한자 많았었고, 政府로부터 많은 支援을 얻어 옛 보다 規模를 넓히고 鞏固하게 지었는데, 그 터는 三千坪하고 五億원의 巨金으로 三年이 넘게 걸린 거창한 事業이었다. 이에 祠宇 講堂 齋室 익랑 門間 垣墻이 다 빠짐없이 갖추어 져서 落成日이 가까워짐에 나에게 記文의 부탁이 있었다.

아 옛날 端宗世祖때에 즈음하여 차마 말 하리요. 이 도리어 가 되고 이 도리어 이 되어 그 임금을 해 죽은 많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成三問 朴彭年 李愷 柳誠源 河緯地 兪應孚 六先生死六臣이 되고, 살아서 忠誠적지 않았으나 꼭 李孟專 趙旅 元昊 金時習 成聃壽 南孝溫 六 先生生六臣이 됨은 무엇 때문일까, 서로 처지가 같았고 마음이 相通 하였으므로 여섯 분은 에 죽고 여섯 분은 에 살았음이다.

忠節節義萬若 立場이 서로 바뀌어 졌더라도, 그 취할 바 또한 따라서 바뀌어 졌으리라. 그러므로 이 열두 先生의 그 자취는 비록 달랐어도, 그 마음은 또한 같지 않은바 없었으니, 생각건대 咸安의 이 書院達城六臣祠千秋萬世巍然相望하리로다. 이로서 를한다.光復後初癸亥(1983)七月旣望(16) 後學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출처 : 함안조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