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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

노촌魯村 2016. 3. 5. 16:33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사적  제73호.경남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서상동))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AD 42~532년) 시조대왕의 수로왕릉(首露王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이며 가락국을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침이다. 수로왕은 알 중에서 맨 처음 나왔다 하여 "수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위에는 신어상(神漁像)이라 불리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있는 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문양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어,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것과 연결시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고대의 낭만적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좋은 자료이다.
신어문양의 납릉정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 외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숙이게 하는 위엄을 느끼게 한다. 봉분의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정도이고, 봉분 앞에는 능비(陵碑)·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망주(望柱)가 있으며, 왕릉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을 비롯하여 안향각(安香閣)·곡사전(曲祀典)·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제(崇祭)·동제(東祭)·서제(西祭)·신도비각(神道碑閣)·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가락루(駕洛樓)·홍살문·공적비·숭화문 등의 부속건물 및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잇다. 숭신각(신도비각)은 가락국 역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고 전한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출처:김해시청)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위에는 신어상(神漁像)이라 불리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수로왕릉(일제강점기.사진 출처:중앙국립박물관 유리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