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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노촌魯村 2016. 4. 8. 21:41

익산고도리석불입상(동쪽불상)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보물  제46호.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 1086번지)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출처 : 문화재청)






익산고도리석불입상(서쪽불상)






천년의 아름다운 사랑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남쪽으로 10리쯤으로 떨어진 들판에 금마를 남류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떨어진 마주 보며 서있는 두 기의 석인상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인석(人石)’이라 부르고 있다. 이 두 기의 석인상은 하나의 석주(石柱)에 머리부분부터 석좌(石座)까지 조각하였다. 석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으며,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이 인상적인 모습이다.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하고 있다.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리워졌고, 옷의 문양은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위에서 좌우로 벌어졌다. 석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 석상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군남 석불중건기(郡南 石佛重建記)’의 비문을 남겼다. 그가 이 비문에서 “이 석불을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석불중건기에는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서․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 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虛虛)하게 생겼기에 읍의 수문(水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금마의 주산(主山)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은데, 말에게는 마부가 있어야한다고 하여 마부로서 이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금마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석상은 서쪽의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玉龍川)이 흐르기 때문에 이 둘은 평시에는 떨어져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와서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한다.(출처:익산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