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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및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노촌魯村 2016. 4. 9. 11:4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국보 제289호.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1번지)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基壇)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부는 기단 면석의 각 면이 2개의 탱주(撐柱)와 우주(隅柱)가 조각된 3매의 돌로 깎아 맞추었으며, 하대 갑석 또한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다.
  탑신부에 있어서 초층 몸돌은 각 면의 중앙에 1개의 탱주와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전부 8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은 층급 받침이 3단인데 지붕과는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여 그 위에 지붕돌을 얹졌는데 지붕돌은 평평한 모습을 보이며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계의 석탑이라고 하겠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있다. 1965년 해체 보수 중 제 1층 지붕돌의 중앙과 심초석(心礎石)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주춧돌으로 사용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좌우 두 곳에 4각형의 홈( 凹 )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 함을 각각 장치하였다. 동쪽 금동제 함 속에는 금으로 된 뚜껑이 있는 네모꼴의 함이 들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다시 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쪽 역시 금으로 된 뚜껑 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금강경판(金剛經)이 발견되었다.
  기단부의 심초석(心礎石)에 설치된 사리공은 ‘品’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 모양의 광배(舟形)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이 들어 있었다. 북쪽 구멍에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 당하였다. 이들 금강경판 등의 사리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설과 통일신라 설, 그리고 고려 초기 설이 대립되어 주장 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쌓기로 조성된 건물지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 연대는 백제시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출처:익산시청)












 

1965년 해체보수 사진 

 












1965년 해체보수 전(前) 사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王宮里五層石塔舍利莊嚴具)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국보 제123호.전북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 국립전주박물관 (효자동2가,국립전주박물관))

마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터에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을 보수하기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에서 고려에 이르는 여러시기의 것이다.
기단부 윗면에 品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청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 1개가 나왔고, 북쪽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또 다른 구멍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각각 연꽃 봉오리모양의 마개가 덮혀있는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긴 다음 접어서 2개의 금줄로 묶은 순금금강경판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2중으로 된 상자(합)안에 안전하게 들어 있었다. 바깥쪽의 외합은 단순히 내합과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으로 장식도 없고 칠도 벗겨져 있었다.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와 주변에는 구슬무늬를 새겨 넣었고, 금강경판이 들어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손잡이로 금고리를 달고 국화 문양을 새긴 것으로 모두 도금 상태가 완전하였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글.사진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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