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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

노촌魯村 2016. 4. 9. 04:46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사적  제405호.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번지)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을 때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만은 보존되어 다시 절을 지은 후 보관하였다고 한다. 탑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주목되는 점은 1965년 백제 무왕의 궁터라고 전하는 왕궁평 성안의 석탑에서 발견한 유물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몇 안되는 백제 절터로서 문헌기록에서 절을 지은 시기와 폐허가 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 무왕대의 왕궁평 유적과의 관련성,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왔다는 사실로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출처:문화재청)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서편 마을 입구쪽에 있는 제석사지는 지금은 민가에 둘러 싸여 점차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이 궁평(宮坪)마을은 백제때의 내궁(內宮)터로 알려졌다. 내궁이란 내원당(內院), 내불당(內佛堂), 내사(內寺)의 성격을 띤 사원이다. 익산지역의 왕궁평성에 궁성을 조성한 백제 무왕은 당시 미래불인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고, 궁궐 근처에 제석천(帝釋天)을 주로 모시는 내불당으로서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여 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현재 제석사지에는 목조탑지(木造塔址)가 있었던 자리에 두 조각으로 갈라진 장방형(長方形)의 큰 돌이 있는데 , 그 돌의 중심에는 네모꼴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탑 아래의 심초석(心礎石)과 같은 것으로 이 네모꼴의 구멍은 바로 사리장치를 두어 던 곳이다.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로 부근에 ‘제석사’(帝釋寺)명을 새긴 고려시대의 기와가 발견되며, 석등의 지붕돌과 동종(銅鐘)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가람배치는 남북 일직선상에 목탑과 금당과 강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 임이 확인되었다. 금당지(金堂址)의 기단은 이중기단(二重基壇)구조로 기단토(基壇土)는 20cm내외의 두께로 다져쌓기를 하였다. 그리고 강당지의 기단구조는 단층이었으며, 주로 수막새와 암막새, 인각와(印刻瓦), 명문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문양은 중앙에 귀신 얼굴(鬼面)을 배치하고, 좌․우로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 수려하게 뻗어 있다(출처:익산시청)




목조탑지(木造塔址)

현재 제석사지에는 목조탑지(木造塔址)가 있었던 자리에 두 조각으로 갈라진 장방형(長方形)의 큰 돌이 있는데 , 그 돌의 중심에는 네모꼴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탑 아래의 심초석(心礎石)과 같은 것으로 이 네모꼴의 구멍은 바로 사리장치를 두어 던 곳이다

목조탑지(木造塔址)에서 본 금당터

목조탑지(木造塔址)에서 본 금당터

목조탑지(木造塔址)

목조탑지(木造塔址)

 ‘제석사’(帝釋寺)명을 새긴 고려시대의 기와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왔다는 사실로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