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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기사(義妓祠)

노촌魯村 2016. 7. 24. 06:12


의기사(義妓祠.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논개의 영정

현재의 논개의 영정은 2008년 5월 새로 봉안된 것이다. 1960년 의기사가 중건된 후 봉안되어 왔던 기존의 논개의 영정은 복식과 머리 모양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어, 진주시와 논개의 고향 지자체인 장수군은 공모를 통해 영정 전문작가에게 새로운 영정를 의뢰했고, 2008년 1월 국가표준 영정 제79호로 지정 받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정 속 논개는 열 손가락에 열개의 가락지를 끼고 오늘의 우리를 맞는다.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된 새 영정은 비단 바탕에 천연 채색된 전신 입상으로, 거사를 결심한 그녀의 의로운 기세가 역력하다. 충남대 윤여환 교수의 작품이며, 정본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우당 유몽인이 야담 :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흩어지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매무새를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는데, 아래는 깊은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데였다. 수많은 왜적들이 보고 좋아라 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씩씩하게 다가왔다. 논개가 웃음 지으며 맞이하니 왜장이 꾀이면서 끌어내려 하자 논개가 마침내 왜장을 끌어안고 바로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義 妓 祠 感 吟  

의기사의 느낌을 읊음(義妓祠感吟) 

(의기사에 걸린 산홍의 시는 논개의 사당을 참배하고 난 뒤 읊은 시)

千  秋  汾  晉  義 

雙  廟  又  高  樓 

羞  生  無  事  日

笳  鼓  汗  漫 遊

              本州妓 山紅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진주 기녀 산홍 : 모습과 예능을 갖추어 빼어났다.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으로 삼고자 하니 산홍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五賊)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내가 비록 비천한 기녀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람일진대 무엇 때문에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이지용이 크게 성이 나 몽둥이질을 했다.
이지용은 1905년 을사5적 중의 한 사람으로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내부대신이었다. 진주에 온 그가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매달리자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楓川渡口水猶香

풍천나루 강물은 아직도 향기로우니

濯我鬚眉拜義娘

머리와 수염을 깨끗이 씻고 의로운 논개에게 절하노라

惠質何由能殺敵

아름다운 성품으로 어떻게 적장을 죽였던가?

藁砧己自使編行

죽음을 각오한 채 거룩한 뜻을 단행했네

長溪父老誇鄕産

장계의 연로자들은 고향 사람이라 자랑스러워하고

矗石丹靑祭國殤

촉석루에서는 단청하고 순국함을 제사지낸다 

追想穆陵人物盛

화려한 왕조 돌아보면 인물이 많다 하지만

千秋妓籍一輝光 

기생이었어도 오랜 세월 그 이름 한결같이 빛나리

                                                           -매천 황현의 시-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선생 :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남 광양(光陽) 출생. 시문에 능하여 1885년(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 향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