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북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노촌魯村 2016. 8. 3. 01:00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국보 제6호.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출처:문화재청)

현재 남아있는 신라석탑으로는 가장 높은 석탑이다. 2층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석탑이지만 탑신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넓어졌다. 기단은 각부를 몇 장의 돌로 조립하였는데 아래위층 기단이 모두 면석에 탱주 네개씩을 세워 놓았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몇장의 돌로 구성 하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들면서 중첩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되었으며, 옥개석 각층마다 낙수홈이 파여져있다. 상륜부는 노반을 이중으로 포개어 쌓았고 그 위에 복발 앙화만이 남아있다.
세부수법에 있어서 약식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의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높은 느낌을 준다. 1917년의 보수때에 제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는데 제6층 옥신 에서는 경감 2매, 칠합 1개, 은제사리병과 그안에 들어있던 유리제사리병 하나씩이 발견되었다.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개합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경으로 창건이후 2차적인 사리납치가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지리적으로 한국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이라는 속칭으로 불리어 지는데 신라 원성왕대(785 ~ 798)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그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충주시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앞의 석등 대석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주위의 조각 작품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옆 남한강의 조정경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