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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고려시대의 경주> -고려시대의 경주는 어떠했을까?-

노촌魯村 2016. 8. 14. 17:21


경주의 고려시대를 집중 조명하는 최초의 전시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유병하)2016712()부터 94()까지 특별전 고려시대의 경주를 개최한다. 신라의 천년왕도로 주목받는 경주의 고려시대를 조망하는 첫 전시이다.

 

도시경관과 지역사회를 키워드로 풀어가는 고려 오백년 경주의 역사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신라가 멸망한 935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시대 경주 지역 사회의 변화와 지역민들의 삶을 도시경관지역사회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국보 126) 등 국보 3, 보물 15점을 비롯해 모두 500여점의 문화재를 프롤로그:경주의 탄생, 1부 읍성과 지역사회 운영, 2부 호국의 상징 황룡사, 3부 지역사회와 불교사원, 4부 동족사회와 무덤, 5부 경주사람들, 에필로그:고려의 동경 경주라는 주제로 구성하였다.

 

프롤로그에서는 경순왕의 고려 귀순으로 경주가 신라 왕경에서 고려의 지역도시로 재편되는 과정을 다룬다. 1읍성과 지역사회 운영에서는 고려시대 경주의 행정 중심이 된 읍성과 지역사회 운영의 모습을 전시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신라 건축물의 석재들과 고려 기와들,동경 굴석사(東京屈石寺)가 새겨진 굴불사 출토 쇠북은 1183년 경주의 전 호장 이백유李伯兪와 승려 도인道人이 제작에 참여하였고 경주를 동경으로 칭했음을 보여준다. 각종 선생안先生案과 호장戶長 관련 전적은 호장과 부윤府尹의 면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전시품이다. 1182년에 세워진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제68)의 입체탁본은 경주가 효행의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2호국의 상징 황룡사에서는 신라의 중심 사찰이었던 황룡사가 고려시대도 경주민의 정신적 중심으로서 여전히 호국의 상징이었음을 새롭게 조명한다. 각종 대형 기와들과 청자 등 고려시대 황룡사 출토품들은 웅장했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해 준다.

3지역사회와 불교사원은 경주의 불교사원이 종교 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 출토 명문기와에서 고려시대 불국사가 숙박시설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 문집자료에서는 분황사가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불국사 석가탑 중수문서(국보 제126)에서는 지역 사회가 하나되어 천재지변을 극복한 모습을, 감은사 쇠북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극복했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국보 126), 왕실이 발원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10(보물 959­1­1) 10여점의 국보보물이 전시된다.

 

4동족사회와 무덤에서는 경주의 고려시대 무덤군을 통해 동족집단의 무덤을 살펴본다. 물천리·화천리·검단리 등 대규모 무덤군에서 일괄로 출토된 청동 그릇과 거울, 수저, 청자 등 규범화된 부장품들이 밀도있게 소개된다. 도읍인 개경에서 발견된 것과 거의 유사한 경주 구정동 출토 쌍용구름무늬띠거울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접접시 등 청자제품과 같은 실생활 용기를 부장하였다.

5경주사람들에서는 이제현李齊賢·김부식金富軾·이의민李義旼 등 경주와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한다. 초상화, 문집, 비문 등으로 그들의 모습과 행적,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다. 또한 고려귀족을 상징하는 묘지명으로 귀족사회에 진입한 경주출신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신발견 고려시대 구결, 임진왜란 이전 기록된 경주 호장 관련 기록 최초 공개

기림사 소장 자비도량참법에서 13세기 고려시대 구결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처음 공개한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우리말과 어순이 다른 한문을 읽을 때 토씨를 달아 우리말로 읽었다. 종래 고려 언어 생활을 알 수 있는 이같이 귀중한 자료는 인왕경 등 5건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유일한 호장안인부사선생안府司先生案도 처음 공개된다. 이것은 경주부 역대 호장戶長의 명단인데, 호장은 향리의 우두머리로서 지방사회의 지배자였다. 1523년 처음 작성된 부사 선생안은 고려시대부터 1787년 신안新案을 작성하기까지 호장의 이름과 생년, 본관 등을 기록하였다.

최신 발굴자료, 경주 읍성 출토품과 구정동 출토 쌍용무늬청동거울 첫 공개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경주 읍성 및 구정동 고려무덤 출토품이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다. 고려시대 경주 읍성 축조에는 옛 신라 궁궐 등 기존 건축물을 해체하여 얻은 석재들이 재활용되었다. 이 중 테두리에 안상眼象을 새겨 화면 틀처럼 삼고 가운데에 인물처럼 생긴 상을 조각한 통일신라기 부조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386~534) 말부터 동위東魏(534~550)를 거쳐 북제北齊(550~577)에 이르는 6세기 불교미술에서 불비상佛碑像의 하단에 새겨진 풍신왕風神王과 유사하다. 또한 서쪽 돈황 막고굴 중에서 서위西魏(535~556) 때 지어진 제285굴과 당(618~907) 초기인 7세기의 제329굴 천정 벽화에도 두 손으로 천을 쥐고 뛰는 역동적인 자세의 풍신風神이 그려져 있어 이와 비교된다. 경북대학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울산 출토 9세기 작作 사암제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중대석에 이와 비슷한 신장상이 새겨져 있으나, 신라에서는 이 소재 자체가 흔치 않아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는 신자료이다.

이와 함께 최근 출토된 경주 구정동 쌍용무늬구름무늬띠거울雙龍文雲文帶鏡은 고려의 도읍인 개성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거울에는 포장재로 사용된 대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다양한 영상과 충실한 역사 자료 제공  

이 밖에 효자의 마을로 선양한 황남동 소재 손시양 효행정려비 일명 효자리비孝子里碑(보물 68)의 입체탁본, 고려시대 경주 역사를 집성한 역사 연표와 지도, 영상과 삽화가 전시 이해를 돕는다. 무료 관람으로 94일까지 이어진다. (출처:국립경주박물관)



김부대왕(경순왕)  :   제 56대 김부대왕의 시호는 경순이다. 천성 2년 정해(927) 9월에 후백제의 견훤 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자,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했는데, 구원벼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그해 겨울인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쳐들어 갔다. 이 때 왕 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처들어 오는 것도 모르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 (하략)



경순왕 영정 이진춘.대한제국 1904년. 숭혜전 소장. 비단에 색




반월성 앞, 못에 비추는 달빛

첨성대 밖, 새벽 더딘 종소리

금문 열려 금추 흔들리려 하자

이쁜 선녀 바로 옥피리 불어 재끼지

신라에는 적병을 물리친다는 만파식적이라는 신기한 피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에게 옥피를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문경새재를 넘자 옥피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건 "옛 주인을 아는 영험한 보물이로다"라며 신라에 돌려주었습니다.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야 말로 왕건의 위세에 굴하지 않는 신라의 충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신라 때 필리로 전하는 옥피리가 있습니다. 함은 1707년 경주부윤 이인징이 만든 것으로 신종 모양의 손잡이를 달고, 잠금장치 부분에는 첨성대 별자리와 함께 신라 때를 기리는 시를 새겼습니다.





당하제명기. 하연 河演(1376 - 1453). 조선 1425년

조선 초기의 문신 하연 河演이 작성한 고려 문종 32년(1078) 이래의 경상도 지역의 역대 관찰사의 명단 기록물입니다. <영주제명기>라고도 하는데 당하 棠下란 중국 고대 주나라의 소공 召公이 팥배나무棠 아래서 사무를 처리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호장김지원의 딸 묘지명. 고려.국립중앙박물관

樂浪金氏女 父戶長智源

낙랑 김씨의 딸이다. 아버지는 호장 지원이다.


<동경굴석사>가 새겨진 쇠북.고려 1183년.굴불사지






금동팔각탑. 고려. 황룡사지.동국대학교 박물관

금강역사/공양하는 사람.고려.황룡사지

사리함.통일신라-고려.황룡사지 심초석.국립중앙박물관




경주읍성 축조에 사용된 석재.신라.경주읍성.경주시

경주읍성 축조에 사용된 석재.신라.경주읍성.경주시

경주읍성 축조에 사용된 석재.신라.경주읍성.경주시


경주읍성 축조에 사용된 석재(손에 주머니를 쥐고 뛰는 상).통일신라 8-9세기.경주읍성.경주시

손에 주머니를 쥐고 뛰는 상 : 신라 통일기에 만든 석조물을 경주읍성의 축조에 재활용한 것입니다. 최근 읍성 정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은 팔뚝 중간에 나팔꽃 모양의 소매가 달린 윗옷을 입었으며. 그 위에 천의를 걸쳤습니다. 하체에는 치마외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었습니다. 왼쪽을 향해 천의를 펄럭이며 달려가는 역동적인 모습인데, 옆으로 긴 돌의 형태에 맞추기 위해서 였는지 자세와 표현이 과장된 인상을 줍니다. 부릅뜬 둥근 눈. 넓은 코. 큰 입. 그리고 귀 옆에 드리워진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이 상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괴물같은 초자연적인 조재임을 암시합니다. 왼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처럼 생긴 물건은 이 상의 성격을 추정에 단서가 됩니다. 손에 주머니를 든 상은 동아시아에서 후대에 재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바람신을 뜻하는 풍신風神 혹은 신장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풍신들, 경북대학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울산 출토 9세기 작作 사암제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중대석의 신장상이 참고됩니다. 팔부중이나 십이지같은 일종의 집합도상으로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셋트로 만들어져 구조물의 일부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금후 연구가 기대됩니다.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제68호) 입체 탁본.정려비.고려 1182년. 탁본 2016년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慶州 皇南洞 孝子 孫時揚 旌閭碑.보물 제68호.경북 경주시 황남동 240-3번지)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시대 사람인 손시양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문(旌門)을 설치하게 된 내력을 적고 있다.
손시양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 각각 3년간 묘소 옆에 막을 지어놓고 곁을 지켰다 한다. 당시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이 왕에게 그의 효행을 글로 적어 올려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비는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고려시대 명종 12년(1182)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채정이 지었다. 이 정려비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사각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길가에 서있던 것을 1977년 받침을 설치하고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고려사.정인지(1396-1478) 외. 조선 1613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목판본

현종12(1012년) 3월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중략)... 5월 경주 조유궁을 헐어 그 자재로 황룡사탑을 수리하였다.











용머리 기와.고려.황룡사지











이 청동반자는 감은사지 발굴과정에서 청동풍탁과 함께 출토되었다. 표면에 겹연꽃무늬가 양각(陽刻)으로 시문(施文)되어 있고 반자의 뒷면 구연부(口緣部) 둘레에 글자 지름 1.5cm 크기의 명문(銘文) 77자가 해서체(楷書體)로 음각되어 있다.

이 명문은 반자의 제작동기는 물론 이 시대의 지명변천과정을 알 수 있으며, 여말(麗末) 해적이 한반도 동해안에도 빈번히 출몰(出沒)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정(至正) 11년 신유(辛酉, 1351) 12월 초3일에 계림부( 林府) 땅 감은사 반자를(만들기 위해서) 입중(入重)33근(斤)을 주지(住持)인 대사△인(大師△印)이 △대(△代)하여 반자(飯子), 소종(小鐘), 금구(禁口) 등을 조성한 일은 해적인(海賊人) 등이 동년 4월 초7일에 右 물망(物芒)을 훔쳐서 가지고 갔었거늘 다시 조성하였다."














청동범종.고려 12-13세기. 굴불사지














보살좌상.고려 말-조선 초.천룡사지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佛國寺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국보 제126호.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 )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탑 내부에 사리봉안을 위한 공간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중심부에 놓여졌던 사리외함과 함께 안에는 알형으로 생긴 은제의 사리 내·외합과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각종 구슬과 함께 있었다. 사리함의 주위에는 청동제비천상과 동경, 목탑,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놓여있었다. 사리함의 바깥 기단부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가 한데 뭉쳐져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사리외함은 4면에 덩굴무늬를 좌우대칭의 모양으로 뚫어 새겼으며,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도 무늬를 뚫어 새겼다. 지붕 위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지붕 꼭대기, 모서리, 지붕 마루에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지붕 끝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아놓았다. 안정된 각부 비례와 정제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사리합 중에서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은제 사리내·외합은 계란모양으로 은으로 도금하였으며 8세기 중엽 양식을 보인 화려한 연꽃무늬와 작은 동그라미를 찍어 만든 어자문(魚子文)으로 장식하였다.
금동 방형사리합은 앞·뒷면에 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보살이 있는 모습과, 옆면에 인왕상을 선각(線刻)하였다. 뚜껑에는 3층 탑 모양의 작은 꼭지가 있으며 합 속에는 향나무로 깎은 작은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 되는 곳에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 보강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은 751년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의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출처:문화재청)

불국사 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 고려 1038년.불국사석가탑. 국보126호.불국사




불국사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佛國寺塔重修布施名公衆僧小名記) 고려 1038년.불국사석가탑. 국보126호.불국사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보물  제95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20번지)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사경(寫經)과 목판본(木版本) 등 일괄 54건 71책이다. 사경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으로 추정되는 『상지은니대반야경(橡紙銀泥大般若經)』 권 210 등 10첩(帖)이 확인되었고, 목판본은 고려 숙종연간(肅宗年間, 1096∼1105)에 조성된 목판에서 13세기 초반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불화엄경』 권26(大方廣佛華嚴經 卷二十六)을 비롯하여 고려말 인출본과 조선 초기 인출본 그리고 연산군 6년(1500)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판각 인출한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장정 형태도 조선시대에 상당수 확인되는 선장본(線裝) 외에 고려 사경(高麗寫經)에서 많이 확인되는 첩장본(帖裝本)과 흔하지 않은 장정 방식인 호접장본(胡蝶裝本)과 포배장본(包背裝本) 등이 골고루 확인된다. 호접장본으로는 고려 충선왕 1년(1309)에 새겼던 목판에서 공민왕 19년(1370)에 다시 인출(印出)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 4∼7, 8∼9 그리고 중국 송(宋)에서 만들어진 목판(木板)에서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물화엄경소(대방광불화엄경소)』 권97 등이 있다. 한편 포배장본으로는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대방광원각약소주경(大方廣圓覺略䟽注經 )』 권상2,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儀)』 권하 등이 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고려시대 조성되었던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의 실례를 보여주며, 고려시기 판각(板刻)되었던 목판의 인출과 다양한 장정(裝訂)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사경과 여러 목판본에서 확인되는 조성 목적과 조성 시기와 장소 그리고 관여했던 인물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조성 당시의 역사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출처:문화재청)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10.고려 1348년.보물 제959-1-1호.기림사.상지에 은니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59.고려 1348년.보물 제959-1-2호.기림사.상지에 은니


불설대방광십륜경 권5.고려 1348년. 보물 제959-1-5호.기림사.상지에 은니

등집중덕삼매경 권하.고려 1348년. 보물 제959-1-6호.기림사.상지에 은니

대방광불화엄경 권26.고려 12-13세기.보물 제959-2-3호.기림사.목판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고려 14세기말. 보물 제959-1-7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고려 1378년.보물 제959-2-16호.목판본







허리띠고리.고려.천북면 물천리/금동장식.고려.천북면 물천리


용모양 청동 제품.고려.천북면 물천리

청동 도장.고려.천북면 물천리

고려의 청동 도장

고려시대의 청동 도장은 문양과 손잡이가 다양합니다. 사찰에서 사용된 청동 도장은 불교와 관련 용어나 구복 求福 관련 용어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 간지,성명, 성씨 등의 내용이나 좋은 글귀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청동 도장 문양의 서체는 형상화되어 알아보기 어렵습니다.청동 도장의 손잡이인 도장 꼭지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형상화한 특이한 조각이 많습니다. 십이지를 비롯하여 불가의 오성수인 코끼리,사자, 말, 소, 개 등 다양합니다. 동인의 제작은 밀랍주조방식으로 주조하였으며, 관인과 함께 주로 사찰에서 만들어였습니다.

용모양 청동 제품.고려.천북면 물천리












여러 왕후들의 그림.傳이제현.고려 1287-1367년.국립중앙박물관

<이제현인>이란 인장이 찍혀있다. 이제현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을 수 있고, 다른 이가 그린 그림에 글씨만 썼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인장의 주인공 이제현은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활약한 이제현일 수도 있지만 돔명이인의 다른 이일 수도 있습니다.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로 전대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박씨 가문과 더불어 으뜸이니 자손 가운데 많은 이들이 문학게 진출하였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에 큰 체구를 지녔으며 얼굴빛이 검고 눈이 툭 튀어나왔다. 두루 익히고 기억력이 좋으며 고금의 일을 잘 알아 신뢰받는 학사 가운데 그보다 뛰어난 이가 없다. 동생 부청 또한 당대에 이름을 드날이고 있다. 한 번은 그 형제의 작명에 대해 알아보니 <북송의 문인 蘇式과 蘇撤>을 흠모해서 작명하였다 한다.


김유구의 묘지명.고려1158년.국립중앙박물관



경주 김씨 어떤이의 묘지명.고려. 중앙박물관

갑인년 7월15일 사망한. 본관이 경주로 서울(개경)에 상고 있는 검교태자소보 김씨의 영혼(甲寅七月十五日慶州在京 檢 敎太子小保金氏之靈)

낙랑군부인 김씨 묘지명.고려 1149년. 중앙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