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전북

동학 농민 혁명 무장 기포지(東學農民革命 茂長起包址)

노촌魯村 2016. 11. 3. 07:47

동학 농민 혁명 무장 기포지(東學農民革命 茂長起包址.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 진을 치고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을 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무장으로 피신하였던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3월 16일경부터 무기를 제작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등 재봉기를 준비하여,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과 연합하여 고부뿐만 아니라 전라도 일대의 군·현에 통문을 보내 각 고을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군사 대오를 갖추고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성격이 변하였다고 한다. 고창군은 지난 2009년 4월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기념 공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포(包) :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봉기할 때의 지역 단위의 부대 명칭

포고문의 내용은 충의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전통 기본 윤리를 전제로 하면서 대중성도 띠고 있다. 즉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이 기포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원문은 『수록(隨錄)』과 『동비토록(東匪討錄)』에 실려 있다.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의 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도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 보는 장소를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 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人之於世 最貴者 以其人倫也 君臣父子 人倫之大者 君仁臣直 父慈子孝 然後乃成家國 能逮無疆之福/ 今我聖上 仁孝慈愛 神明聖睿 賢良正直之臣 翼贊佐明 則堯舜之化 文景之治 可指日而希矣 今之爲臣 不思報國 徒竊祿位 掩蔽聰明 阿意 謟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匪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渝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怨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遂壞而無遺矣 管子曰 四維不張 國乃滅亡/ 方今之勢 有甚於古者矣 自公卿以下 以至方伯守令 不念國家之危殆 徒切肥己潤家之計 銓選之門 視以生貨之路 應試之場 擧作交易之市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報 驕侈淫昵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民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 吾徒雖草野遺民 食君土 服君衣 不可坐視國家之亡八路同心 億兆詢議 今擧義旗 以輔國安民 爲死生之誓 今日之光景 雖屬驚駭 切勿恐動 各安其業 共祝昇平日月 咸休聖化 千萬幸甚].”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학 농민 혁명 기록화

살기 좋고 평화로운 고창 들녁과 농민들
고창읍성과 농민 수탈
새로운 세상을 꿈구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비결사건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하는 전봉준과 손화중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다. -무장기포-
동학농민군의 고부관아 점령
황토현전투 승리 후 남하하는 동학농민군
동학농민군의 무장객사 휴식과 재정비
장성전투에서 승리하는 동학농민군
집강소 설치와 폐정 개혁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남북접 동학농민군의 논산 합진
서울을 점령하라 -우금치 전투-
나주성 공격을 앞둔 손화중의 고뇌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등불이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