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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地)

노촌魯村 2016. 11. 26. 21:52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地.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번지)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출처:문화재청)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



반계서당: 반계 유형원선생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 대대로 한양에 터를 잡고 지낸 경화사족(京華士族:한양과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이라는 일반적 의미 이외에, 특히 18세기 이후 서울[京華]과 지방[鄕村]의 정치·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화되는 경향분기(京鄕分岐)의 흐름에서 서울을 높이고 지방을 낮추던 풍조 속에 번화한 서울의 사족을 특별히 지칭하기 위하여 고안된 역사 용어이다) 이었던 그는 정쟁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개혁안을 마련했다.

수록(隨錄) :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반계수록磻溪隨錄은 그 의미와는 달리 아주 체계적이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반계서당




반계서당 돌담 안의 우물


반계서당 돌담 밖의 우물

 반계서당 주변에는 반계선생이 손수 팠다는 우물이 2개 남아있다. 울 밖과 울 안에 각 하나씩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다.

반계정

반계서당에서 내려다본 우반동의 너른 들판 : 선생은 이 들판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을 바라보며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반계수록>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