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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진지(木浦鎭址)

노촌魯村 2017. 12. 2. 19:49



목포진지(木浦鎭址.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전남 목포시 만호동 1-56번지)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鎭營)이며 목포영·목포대라고 불렀고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과 경상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목포는 조선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1439년 (세종21년) 처음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 되었으며, 성의 모습이 갖추어 진것은 1502 (연산군 8년)으로 전해진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둘레 1,306척, 높이 7척 34촌이었으며,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그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 (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 되었다.
폐진 직후인 개항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 일본영사관 또는 역국사관 기지로 사용 되다 훼손되어 목포진 유적비만이 남아있던 곳을 2014년 현재의 모습으로 일부 복원하였다.(출처 : 목포시청)






만호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세종 21년(1439년 4월 15일) 의정부가 무안 현의 목포는 왜적침입의 요해처이므로 만호를 파견하고 병선을 주둔토록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것이 목포만호진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현재의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城)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어간임이 밝혀지며 당시 중지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출처:목포시청)


전패


  목포진을 찾아가기 위해서 초원호텔 앞쪽 언덕에 있는 성결교회의 입구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교회 앞 오르막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목포 답사일번지 목포진의 유적비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목포진은 목포시 만호동 4통 3반 1-56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유적으로 목포영이라고 불리우며 만호(萬戶)가 지휘 통솔했다 하여 만호진, 만호영, 만호청이라고도 불리었다.
만호라는 지명은 여전한데 성곽은 간데없고 모진 세월만큼 깎인 돌비석만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사방이 건물로 막혀 있는 곳에서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돌비석!

그렇게 뚫어지게, 아프게 바라보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대체 목포진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건물에 가려진 풍경이 궁금했다.
주변에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와마!!! 눈으로 확~들어오는 풍경!

굽이치며 흐르는 영산강물이 목포 앞바다로 흐르고, 삼학도가 흘러가다 우뚝 멈춘 듯 바로 목포진 앞에 서있다. 작은 섬사이로 수없이 왕래하는 배들을 지켜보며눈썹 같은 유달산 아래 불꽃같은 눈동자가 바로 목포진이였음을 새삼 알 수 있었다.

  "호남읍지"에는 성석축의 둘레를 215보, 높이를 7철, 여첩의 둘레를 140보, 높이를 2척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성의 동쪽에 둘레가 35보인 못이 하나 있으며 성문으로는 남문과 서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 군사제도의 개편 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고종 32년)7월 15일 칙령 제 141호로 폐진 되었다. 현재는 목포만호비와 만호동 일대 일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 등이 만호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목포 만호진 모형


목포진지(木浦鎭址)에서 본 삼학도

목포진지(木浦鎭址)에서 본 유달산

목포진지(木浦鎭址)에서 본 노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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