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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의 봄

노촌魯村 2018. 3. 18. 21:20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 문화재자료 제228호. 경남 밀양시 활성로 24-184(용활동))

금시당(今是堂)은 이광진(今是堂 李光軫:1513~1566)이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해 명종 21년(1566년) 밀양강변에 창건한 별업(別業)이다. 금시당(今是堂)이란 명칭은 중국 당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이광진은 명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 각조 랑관(各曹 郞官),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과 집의(執義), 사유(師儒) 등 요직을 두루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명망이 높았다. 금시당 이광진은 별업을 조성한 그 해에 별세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근재 이경홍(謹齋 李慶弘)이 선친의 유지를 이어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했다.
금시당 이광진이 창건한 건물이 임진왜란때 불타버렸으므로 임란후 영조 19년(1743)에 그의 5대손인 교남처사 백곡 이지운(嶠南處士 栢谷 李之運:1681~1763)이 이를 복원하였다. 이 별업을 복원한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서 다시 이지운의 6대손인 만성 이용구(晩醒 李龍九)가 주관하여 철종 11년(1860)에 경내에 백곡재(栢谷齋)를 새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금시당의 10대손 무릉옹 이종원(武陵翁 李鍾元)과 11대손 만성 이용구가 문중의 뜻을 모아 고종 4년(1867)에 건물을 해체하고 크게 중수한 후의 모습이다.
금시당은 정면 4간, 측면 2간 홑처마 팔작집으로, 평면은 좌측부터 마루 2간, 온돌방 2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고직사에서 정자 영역에 이르는 동선, 경관 등을 고려하여 온돌방을 고직사 쪽에 두고, 강변 쪽에 개방된 마루를 시설한 형태이다. 대청마루 좌측면과 후면 및 온돌방 배면에 쪽마루를 달아냈다. 柱樑作은 초익공형식으로, 익공쇠서를 물익공처럼 둥글게 깎았다. 익공쇠서의 뒤는 단부를 2단으로 깎았는데, 윗부분은 사절한 형태이고, 그 하부는 반원형으로 깎았다. 상부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위에 제형 판대공을 놓아 종보를 받고 있다. 건물 사면의 주간에는 창방과 굴도리 받침장여 사이에 소로를 끼워 수장했다.
백곡서재(栢谷齋)는 금시당과 ㄱ자형으로 배치된 건물로, 평면형식과 건축수법에서 금시당과 매우 유사하다. 정면 4간, 측면 2간 홑처마 팔작집으로, 평면은 정면 좌측부터 온돌방 2간, 마루 2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방간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공간의 융통성을 높였다. 온돌방의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백곡재의 주량작(柱樑作)은 초익공식으로 도리는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익공쇠서의 단부는 직절한 형태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위에 판대공을 놓고 종보를 지탱하였다. 외기․중도리사이․툇간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다. 마루의 귀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들보와 선자연 등에 태극문양을 그려 놓았다.(출처 : 밀양시청)




금시당(今是堂)

백곡재(栢谷齋)

금시당 백곡재(今是堂 栢谷齋)






금시당에서 본 밀양(밀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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