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남

변계량 비각(卞季良碑閣)

노촌魯村 2018. 3. 19. 03:56


변계량 비각(卞季良碑閣.문화재자료 제27호.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변계량과 그의 아버지 판서공 변옥란, 친형인 춘당 변중량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이다.
변계량(1369∼1430)은 조선 건국 초기에 예조판서 등의 여러 중요한 관직을 거쳤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20여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세종(재위 1418∼1450) 때에는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수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변옥란(1322∼1395)은 고려말에 3판서를 지내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의 공신이 되었다.
변중량(1352∼1398)은 조선 태조 때 좌승지를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담장이 둘러싸인 자그마한 비각으로 ‘변씨 3현 비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비각은 1946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그들의 행적을 기리고 옛 자취를 기념하고자 고향인 이곳에 터를 잡았다.(출처:문화재청)


초동면 신호리 대구마을 입구 큰길가에 있는 이 비각(碑閣)은 일명 변씨 3현비각이라고 불리우는데, 고려말 판서(判書) 변옥란(卞玉蘭)과 그의 아들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 춘정(春亭)(卞季良)등 삼부자(三父子)의 생장한 곳과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46년에 후손들이 그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관서 변옥란(1322-1395)은 고려말에 3판서를 역임하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춘당 변중량(1352-1398)은 태조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한 문관(文官)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춘정 변계량(1369-1430)은 춘당의 아우이며 조선조 건국 초기에 여러 요직을 거쳐 일국의 대문장가로써 20여년을 종사하였으며, 특히 세종의 문치시대에는『태조실록(太租實錄)』의 편찬과『고려사(高麗史)』의 개수(改修)는 물론 크고 작은 외교사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임금을 잘 보필하여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찬란하였다. (출처 : 밀양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