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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도화리 고가(堤川 桃花里 古家)

노촌魯村 2018. 4. 7. 03:40



제천 도화리 고가(堤川 桃花里 古家.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 충북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로 2048 (물태리))

도화리에 있는 옛집으로, 지금의 살림채는 ㄷ자형이나 앞쪽에 건물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깥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고, 건넌방 앞에 부엌과 상방을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안방과 웃방은 장지문을 설치해 터놓을 수 있도록 하지만, 이 집은 그 사이를 벽으로 막았는데 이것은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방식이다.
대청과 부엌은 집의 규모에 비해 넓은 편이다. 상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놓아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창 옆의 코쿨(관솔을 지펴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남한강 줄기를 낀 청풍면·한수면·수산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선사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또한 곳곳에 선사 시대의 집 자리 유적과 고인돌, 삼국 시대에서 고려 시대에 이르는 고분군들이 흩어져 있는 등 강줄기를 따라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제천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는 인근의 생활 중심이었던 관계로 많은 생활 유적이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1985년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댐 상류에 위치한 이 지역의 마을들은 대부분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충청북도에서는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안에 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0년부터 수몰 대상 지역 안의 문화 유적을 지표·발굴 조사 하였으며, 1983~1985년에 중요 문화재를 청풍문화재단지 및 그 주변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비록 원위치는 물속 깊이 잠겼지만 문화유산은 원형이 보존되어 당시 선조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제원군 청풍면 도화리에 있던 김영국 가옥을 충주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인하여 1985년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1981년 5월 1일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천 도화리 고가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자형의 홑처마, 우진각 기와집이다. 평면은 중앙 3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부엌, 상방을 배치하고 동쪽에는 방 2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서쪽의 상방 앞으로는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아 접객 공간으로 이용했다.

동쪽의 방 2칸은 장지문을 설치하여 틀 수 있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집에서는 그 사이를 벽으로 막아 버렸는데 이는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집의 규모에 비해 3칸의 대청과 2개의 부엌은 넓은 편이다. 원래는 바깥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의 배치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 구조는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는데, 서쪽의 상방 앞에 설치된 툇마루는 원기둥을 세우고 부섭지붕을 이어 붙였다. 가구 형식은 3량가로 하였다. 제천 도화리 고가는 현재 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나 귀처마의 서까래를 평행 서까래로 구성한 점과 추녀를 종도리까지 결구하는 수법 등 초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구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사용된 서까래도 일반적으로 기와집에 사용된 서까래에 비해 가늘고 빈약해 보인다.

창호는 방을 비롯해서 대청마루 배면 문까지 모두 띠살문으로 구성하였다. 안채 좌측 익랑에 있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이의 벽은 정자살문과 큰 들어열기 정자살문으로 벽면을 구성하였다. 창호만으로 벽을 막아서 필요시 대청과 안방을 한실로 쓰고자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가옥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주위로는 막돌 담장을 둘렀고, 가옥의 동쪽 뒤편 담장 앞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에 기와를 얹은 광이 위치하고 있다. 제천 도화리 고가는 원래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단의 낮은 냇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집이었다. 또한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측 부분에 각각 장독대를 두고 뒤뜰과 옆 마당은 밭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옥만 이전하여 이전의 자연 환경은 찾아볼 수 없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