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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 안희제 생가(宜寧 安熙濟 生家)

노촌魯村 2018. 8. 8. 20:33


의령 안희제 생가(宜寧 安熙濟 生家.문화재자료 제193호.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37 (입산리))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생가이다.
안희제는 독립운동가로 창남학교, 의신학교 등을 설립하여 신학문 보급에 힘을 썼으며, 민족언론의 선구자 역할도 하였던 분으로 5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생가는 안채, 사랑채 2동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방·대청·방·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 건물로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마루를 1칸씩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한데도 별도의 건물을 두지 않고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주택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출처 : 문화재청)





 




1885(고종 22)∼1943. 독립운동가·실업가.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백산(白山).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21세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해 24세에 졸업하였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창설하였다.

1909년 10월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다수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종교에서는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존하였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