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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임진왜란, 그 참혹함을 기억하는 선진리성에 벚꽃은 피고 ...

노촌魯村 2018. 3. 31. 16:14

임진왜란, 그 참혹함을 기억하는 선진리성
온갖 쓰라림 간직한 채 화려한 벚꽃 피웠어라
선진리성 벚꽃엔 웃음만 있지 않으니
흩날리는 꽃잎 맞으며 아파도 해보시라

선진리성으로 향하는 길목 입구에서부터 벚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사천의 선진리성은 임진왜란 시기에 쳐들어온 왜군들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일본식 성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리왜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선진리성의 성 안쪽과 외곽 쪽으로 많은 시설과 건축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야트막한 언덕에 성곽의 흔적만 확인 할 수 있으며 봄이 되면 성의 주변에 벚꽃이 만발하여 마치 과거의 상처를 벚꽃으로 감싸려는 듯 한 모습이 관광객들을 맞이합니다.

따스한 봄볕이 내려쬐는 어느 날, 벚꽃으로 사천에서 유명한 선진리성으로 향합니다.
선진리성으로 향하는 길목 입구에서부터 벚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도로 양옆에 빼곡하게 들어선 벚나무들이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면 화려한 눈꽃을 흩뿌리며 사람들을 반기는 듯합니다.            

20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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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터 20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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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선진리왜성(泗川船津里倭城. 경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사천선진리왜성(泗川船津里倭城. 경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외)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 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東岸)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構築)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土築)으로 된 창성(倉城)이다. 이 창성은 본래 서남북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하고 동쪽 일면(一面)만 육지로 통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二面)은 모두 농경지(農耕地)로 변하고 서쪽 일면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城址)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고지(高地) 일부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城)은 왜성(倭城)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倭軍)이 사천지역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모리길성(毛利吉成)으로 하여금 성(城)을 구축했다는 일본측 기록 즉, 도진가기(島津家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우리의 관계문헌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고찰(考察)해 보면 결코 왜성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성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보면 고려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을 조창이 설치될 무렵 이 곳의 지명을 통양포(通陽浦) 또는 통조포(通潮浦)라 하였다.

이어 조선초기에는 통양포가 다시 통조포로 변했는데 조창명도 이에 따라 통양창(通陽倉)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이때가 태종(太宗) 3년(1403)의 일로서, 이후 통양창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세(租稅) 운송은 육로(陸路)로 전환되었다.

임진란 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곳의 지명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倉),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동양창(東洋倉) 따위로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은 전사(傳寫) 과정에서 음운상과 통양(通陽)과 통양(通洋)의 오사(誤寫)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사천(泗川) 고성(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 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구한말(舊韓末) 때는 화계(花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연포동(蓮浦洞), 통양동(通陽洞) 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의 이름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된 것이다.

다음은 조창지(漕倉地)로서의 선진에는 이를 지키기 위해 창성(倉城)이 축조되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文獻) 가운데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覽) 고적조(古跡條)에 의하면,   즉,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리,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개성(開城))로 조운(漕運)하였던 12조창(漕倉) 중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가 3,086尺이 남아 있다" 라고 하였고,

또 사천현여지승람 고적조와 전선소조에

"통양창성(通洋倉城)은 현의 남쪽 17里에 있고 토성(土城)의 둘레가 3,086尺이며 즉 옛날에 조세(租稅)를 거두어 들인 곳이다. 전선소(戰船所)는 현(縣)에서 남쪽 17里인 통양창성(通洋倉城) 안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에서 세 가지의 공통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거리 17리(里)이고,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인 창고가 있다는 점, 셋째는 토성지(土城址)의 둘레가 3,086척(尺)의 규모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17리(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1리는 지금의 거리로 환산하면 약 540m가 된다고 한다) 는 지금의 9.18㎞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인 사천읍에서 조창지 선진까지는 약 10여㎞가 된다. 그리고 셋째의 토성지(土城址)는 창성(倉城)으로서 지금도 그 형적(形跡)의 일부가 역력히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태껏 이 토성지(土城址)는 옛 당병성터, 또는 왜성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이다.

조창의 기능은 원래 국가 경영의 재정적 세원(稅源)인 조곡(租穀)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海路)를 통해 중앙 조정과 조운(漕運)한 기지(基地)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앙에서 판관이 파견(派遣)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왜구(倭寇)의 침입과 약탈(掠奪)을 막기 위해 창성(倉城)을 쌓고 수군(水軍)이 방어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와 같이 조창이 고려초부터 이곳에 택지(擇地)된 까닭은 지정학상으로 이 지역은 일찍이 수도(水稻) 경작(耕作)이 시작되어 물산(物産)이 풍부하였고 또 바닷길이 열려 삼한(三韓) 때부터 외국과 무역 관계를 개설하여 포(布), 철(鐵) 등의 물자를 중국과 일본에 교역(交易)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임진란 시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海戰)으로서 선조(宣祖) 25년(1592) 5월 29일 함선(艦船)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麗水本營)을 떠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선진(船津)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한 싸움 끝에 적선(敵船)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戰果)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해전(泗川海戰)이며 이때 해전사상(海戰史上)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하였다.

거북선이 사천해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한데 대하여는 두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것이다.

첫째는 거북선의 전투력을 과시하여 우리 수군의 사기를 진작시킴과 아울러 왜군들은 생전 처음보는 거북선의 엄청난 화력과 종횡무진으로 항해하여 적선을 들이 받아 쳐 부수는 능력을 보고 왜군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게 하였고,

둘째는 왜군의 수군과 육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하는것을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승리함으로써 저지하였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음은 육전(陸戰)으로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무술년(戊戌年 1598) 10월 초하루 명(明)나라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은 마병(馬兵), 보병(步兵)으로 구성된 전병력을 동원하여 이 성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 병력으로 아군(我軍)의 1/4정도였다. 이때 보병 유격장(遊擊將) 팽신고(彭信古)는 적의 성채를 공격하던 중 진중(陣中)에서 화포(火砲)의 오발로 탄약궤(彈藥櫃)에 인화(引火)되어 화염이 치솟고 아군(我軍)이 혼란에 빠지자 효기(效機)를 포착한 성채의 적이 역습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砲陣地)를 유린하였다. 이때 유격장 모국기(茅國器)와 엽방영(葉邦榮)이 성채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殘兵)을 수습 적 출격대의 배후(背後)로 돌아 성으로 돌진(突進)하여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 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騎兵) 제장(諸將)의 전열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敗走)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恥辱)의 전흔(戰痕)이 남아있는 곳이 지금의 선진리성 어귀에 위치한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覽)》(1699년간)에 의하면 숙종조때 선진리에는 수군(水軍)의 전선소(戰船所) 즉,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전선(戰船), 병선(兵船) 각 1척과 사후선(伺候船=정탐선(偵探船)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城內)에는 비후당(備候堂)과 수전군기고(水戰軍器庫) 그리고 관해정(觀海亭)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兵力)으로는 수군(水軍) 40주사사(舟師射) 및 포격(砲格)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睦台林)이 쓴 동성부(東城賦)에 의하면 능노군(能櫓軍) 145, 포수(砲手) 34, 화포수(火砲手) 10, 사궁(射弓) 30명 등이 상주(常駐)하고 영조(英祖) 36년(1760)에 설치한 진주 가산창(駕山倉)의 방어 임무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赴操)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대원군은 연해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방어의 요충과 변방의 중요한 곳에 많은 진(鎭)을 설치했다. 이때 외적(外敵) 방어에 효과가 많은 포군(砲軍)을 많이 양성했는데 포군은 조총(鳥銃)을 주로 사용한 총수(銃手)와 화포(火砲)를 사용한 포군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舊韓末) 때인 1895년(고종 32) 통제영(統制營)을 비롯하여 각 도의 수영(水營) 이하 모든 군영(軍營)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裝備)가 군부(軍部)로 넘어 갔는데 선진(船津)의 진보(鎭堡)도 이 때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1894년(고종 31)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선진리성 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의 무기(武器) 일부를 탈취하여 하동(河東) 고승당산(高僧堂山)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전설(傳說)이 전하고 있다.

선진리성은 일제(日帝) 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란 시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 하여 관심을 끈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城址)를 고적(古跡) 제81호로 지정(指定)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무술전투(戊戌戰鬪)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 성터의 일부를 매수(買收) 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하고 공원 정상에다 사천신채첩지비(泗川新寨捷之碑)라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將星)들이 그들 조선(祖先)의 전적지(戰迹地)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해방되던 그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 여 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우리 시에서는 1978년 사업비 4,700여 만원을 들여 공원경내에 이충무공(李忠武公) 사천해전승첩비(泗川海戰勝捷碑)를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 선진리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倭船)을 격파한 국란극복사(國亂克復史)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본사람들이 세웠던 비석 자리에는 6.25전쟁 때 산화(散華)한 공군(空軍) 장병(將兵) 전몰자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리는 충령비(忠靈碑)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2동과 돌계단 70m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公園)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공연장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공연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또한 새천년의 시작을 기념하고 사천시의 번영과 화합을 다지는 매향비와 자연보호헌장비가 우뚝 서 있다 (출처 : 사천시청)

이충무공(李忠武公) 사천해전승첩비(泗川海戰勝捷碑)

1978년 사업비 4,700여 만원을 들여 공원경내에 이충무공(李忠武公) 사천해전승첩비(泗川海戰勝捷碑)를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 선진리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倭船)을 격파한 국란극복사(國亂克復史)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적문

여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해를 침공하는 전진기지가 되어 왜적이 날뛰었던 곳이며 우리 수군의 용전으로 적을 물리쳐 크게 이긴 곳이다.

1592년 4월 13일 왜병 20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한편 적 수군은 거제도 등지로 침공하였다. 우리 수군의 1차 출전은 5월 7일 옥포 합포에서, 5월 8일은 적진포에서 적선 42척을 격파하였으나 부산포에 있는 적 수군은 계속하여 거제 고성 등지를 분탕질하였으며 사천 선창에는 적의 큰 배 12척이 열박하고 4백여 명의 적병이 산 주위에 장사진을 피는 등 그 세력이 날로 더하고 있을 무렵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은 적의 세력이 증강되기 전에 쳐부숴야 한다고 판단하여 5월 29일 여수 본영을 떠나서 2차 출정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크고 작은 배 23척을 거느리고 경상도 우수사 원균의 배 3척과 합세하여 곧바로 사천 앞바다로 나아가 적선 1척을 쳐부수고 일시에 공격할 방책으로 거짓 퇴각하는 것과 같이 적을 유인하니 적군은 산 주위에서 나와 배를 지키고 일부 병졸은 언덕 아래에 진을 치고 포와 조총을 쏘아 대었다. 우리 수군은 밀물 시기를 기다려 거북선을 앞세워 적선에 돌진을 하면서 각종 무기를 일제히 발사하니 포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치열한 화력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최선두에서 지휘하던 중 적의 철환을 맞아 왼쪽 어깨를 부상당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활을 당겨 적을 쏘았다. 적병은 크게 패하여 흩어져 도주하고 적선은 모조리 불태워버려 통쾌하게 전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묘책과 용전으로 적을 격퇴하여 적의 수륙병진계획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이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전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78년 12월

무술전투(戊戌戰鬪)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 성터의 일부를 매수(買收) 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하고 공원 정상에다 사천신채첩지비(泗川新寨捷之碑)라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將星)들이 그들 조선(祖先)의 전적지(戰迹地)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해방되던 그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본사람들이 세웠던 비석 자리에는 6.25전쟁 때 산화(散華)한 공군(空軍) 장병(將兵) 전몰자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리는 충령비(忠靈碑)가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