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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생가

노촌魯村 2018. 8. 13. 06:52


호암 이병철 생가(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호암길 22-4)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며, 부유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음식을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을 정도로 낭비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았던 호암 이병철선생의 생가이다.
남서향으로 지어진 일자형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뒷산 대나무와 함께 운치를 더해준다. 호암선생이 좋아했던 오동나무, 우물, 유품을 둘러볼 수 있다.



사랑채

안채


우물 그리고 곳간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출생과 성장
호암 이병철선생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이자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다섯살때부터 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살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 이듬해에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팽년의 후손인 박두을여사와 결혼했다.
 
협동정비소 설립

결혼후에도 학업에 전념하던 이병철선생은 193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낸 사회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선생은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1936년 봄 이병철 선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공동 투자하여 협동정미소를 설립했고, 이후 팽년차운송업도 병행하여 사업규모를 키워나갔다.
 
삼성상회 설립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제조업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가도를 달렸고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어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창립한 삼성상회는 오늘날 삼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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