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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珍島 金骨山 五層石塔)

노촌魯村 2019. 11. 22. 22:23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珍島 金骨山 五層石塔. 보물 제529호. 전남 진도군 군내면 금골길 58 (둔전리) / (지번)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356-2)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에 속했던 석탑으로, 지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위치로 짐작된다.
1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아 두껍고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제167호)과 비슷하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좁고 기형적으로 길고 높은 매우 특이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당히 넓고 두꺼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각 층 지붕돌의 모습에도 차이가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 또한 1·2·4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정형화된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장식만 있을 뿐 다른 부재는 없다.
이 탑의 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은선리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한 백제 양식이 국토의 최남단 섬에까지 퍼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각 부분의 양식이 독특하고 불규칙적인 면이 많아 탑 양식에 지방색이 많이 드러나게 되는 고려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출처 문화재청)












금골산(金骨산)

금골산(金骨산)과 유자

금골산마애여래좌상(金骨山磨崖如來坐像.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산94-1번지)

전라남도 진도군 금골산에 있는 석굴의 벽면에 새겨진 이 불상은 엄지와 네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손모양으로 보아 아미타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신체 또한 둥글게 팽창시켰지만 입체감이 없이 평면화되어 보인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은 무릎까지 내려와 도식적인 물결무늬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가슴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 있는데, 아마도 불상에 관련된 서적 등의 복장품(腹藏品)을 넣어두었던 곳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토속적으로 새겨진 이목구비, 몸을 부풀게 표현한 특징은 고려시대 지방화된 양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진도 용장산성에서 본 금골산


금골산(해발 193m)은 "진도의 금강"이라고 불리우는 명산으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에 세개의 굴이 있고 5층석탑(보물 제 529호)과 산 중턱의 굴에 마애여래좌상(전남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음각되어 있으며 해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1498년 정언벼슬을 지낸 이주(李胄)가 무오사화때 이곳에 유배되어 금골산의 아름다움에 감탄, 『금골산록』을 지어 서거정의 동문선에 실려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이주가 기록한 <금골산록>
이곳 금골산에 대해서는 이주(李冑)의 <금골산록>에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498년(연산군 4) 정언(正言) 벼슬을 지내던 이주는 세조를 공격하고 풍자적인 조의제문을 만들어 이조사화의 원인이 되었는데,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진도에 유배되어 금골산에 머무르면서 금골산록(金骨山錄)을 썼다.
이주는 <금골산록>에서 금골산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는데 이 기록이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나온다.
이주는 진도의 유배객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들어온 사람으로 진도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금골산에 만 들어가 살았다. 그는 금골산에서 수도승처럼 지냈다고 한다. 금골산에는 3개의 굴이 있었는데 굴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상굴에 살았다.
그는 세상을 멀리하고 이곳에 거처하면서 아침과 저녁은 차 한사발로, 낮에는 밥 한 그릇으로 때우며 마치 신선같이 살았던 것 같다.
이주가 금골산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 편이 <밤에 앉아서(夜坐)>(망헌집)이라는 시이다. 유배지에서의 가슴 시린 쓸쓸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시이다.

음산한 바람 불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바다 기운이 산속의 깊은 석굴까지 이르네
이 밤, 덧없는 인생은 흰머리만 남아
등불 켜고 때때로 초년의 마음을 돌아본다.

이주는 상굴에 살면서 오게(五偈)를 지어 승려 지순(智純)에게 주었다고 한다. 오게는 푸른솔(靑松), 지는 잎(落葉), 조수(潮), 흰구름(白雲), 대나무(竹)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가 금쇄동에서 지은 '오우가'를 연상케 한다.
금골산록은 고산이 금쇄동기를 쓰면서 산의 형세를 아주 세세하게 묘사한 것처럼 금골산의 형세를 아주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를 보면 옛 사람들의 묘사력과 자연에 대한 감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골산은 진도읍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과 같다. 서북은 바다에 닿고 지맥이 물구거리며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간검이 되고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이 벽파도에 이르러 그쳤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리인데 아래는 큰 절터가 있어 이름은 해원사(海院寺)다. 9층의 석탑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으며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는데 그 맨 밑에 있는 것은 서굴이다. (…)
그 맨 위의 것이 상굴인데 굴이 중봉 절정의 동쪽에 있어 기울어진 비탈과 동떨어진 벼랑이 몇 천길인지 알 수 없으니 원숭이 같이 빠른 동물도 오히려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다. 동쪽에서는 무엇을 더 쉬잡아 발붙일 땅이 없고 서굴을 경유하여 동으로 올라가자면 길이 극히 위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