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청도

애국지사愛國志士 매운梅雲 이정희李庭禧 선생 추모비

노촌魯村 2020. 3. 29. 20:38


애국지사愛國志士 매운梅雲 정희李庭禧 선생 추모비

이정희는 1881(고종 18)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명대(明臺)에서 출생하여 1955년 사망하였다. 1915년 광복회 고문, 1921년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 참여 등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정희(李庭禧)는 대구 광명 학교(光明學校)에서 신학을 수학하였으며, 1909년 대구에서 박민동(朴民東)이 설립한 측량 강습소(測量講習所)를 졸업하였다. 또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정희는 1910년 일제가 나라를 빼앗자, 이상룡(李相龍)[안동 출신박상진(朴尙鎭)[울산 출신] 등과 조국 독립을 위해 뜻을 함께 하였다. 1912년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미곡상 상덕태 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만주와 상해에 지점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연락 기관으로 삼았다. 1913년 윤치오(尹致旿)와 함께 한미 흥업 회사(韓美興業會社)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1914년에는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백산 상회(白山商會)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음력 115일 박상진·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 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 교육 기관과 곡물상의 상업 조직을 통해 독립군을 지원한 비밀 결사였다. 이후 조선 국권 회복단은 1915715일에 경상북도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 구입을 목적으로 한 광복회(光復會)로 발전하였다. 

이정희는 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 온막동(溫幕洞)에 온명 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 의식 고취에 힘썼다. 또한 1921년 경상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후원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2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3122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 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이정희의 해방 후 경성 왕래 일기(解放後京城往來日記)194594일 광복회를 재건하고 대표를 역임하며, 영남의 유림 대표로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반공 반탁 운동을 전개하는 등 건국 운동에 헌신하며 남긴 일기이다.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