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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壬亂(임란) 倡義(창의) 固城李氏(고성이씨) 淸道(청도) 五義士(5의사) 崇慕壇(숭모단)

노촌魯村 2020. 3. 29. 20:45


壬亂(임란) 倡義(창의) 固城李氏(고성이씨) 淸道(청도) 五義士(5의사) 崇慕壇(숭모단)

유등지 옆 얕은 언덕에 '청도 오의사 숭모단'이 있다. 이곳 숭모단비(崇慕壇碑)에 모셔져 있는 다섯 분 의사들은 모두 고성이씨 문중 인물들이다.

청도 오의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고성 이씨 이경, 이해, 이잠, 이렴, 이철이다.

비석 앞면에는 '壬亂(임란) 倡義(창의) 固城李氏(고성이씨) 淸道(청도) 五義士(5의사) 崇慕壇(숭모단)'이라는 열여섯 한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다섯 분의 존함, '李磬(이경), 李海(이해), 李潛(이잠), 李濂(이렴), 李澈(이철)'이 뚜렷하다.

비석 좌우에는 다섯 분의 모습을 아로새긴 동판 부조와 공적을 밝힌 돌판도 세워져 있다.

'서기 1592년 임진년 414, 헤아릴 수 없는 왜군들이 부산포에 갑자기 들이 닥쳤다.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빌려 달라"는 구실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침입한 것이다. 이것이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시작이며 우리나라는 태평의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항전하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순국하고 왜군들은 삼랑진에서는 큰 저항을 받았다. 밀양부사 박진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밀렸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420, 상륙한지 7일 만에 청도가 함락되었다. 

고요하던 협촌에 하늘이 깨지는 듯한 조총소리를 듣고 군수마저 혼비백산하여 관졸들을 데리고 최정산으로 사라졌다. 백성들은 우왕좌왕하며 산과 계곡으로 도망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왜군은 의기충천하여 굶주린 이리떼처럼 이르는 곳마다 산야 촌락을 불 지르고 살육을 자행, 생지옥을 방불하게 했다. 

이에 비분강개한 고성이씨 일문 5의사가 분기하여 책을 접고 결연히 구국성전에 몸을 던졌다. 의병을 일으킨 5의사는 이경(李磬), 이해(李海), 이잠(李潛), 이렴(李濂), 이철(李澈)이다.'

이경(李磬) 의사는 고성이씨 16세손으로 예빈시봉사로 종질 이해, 이잠, 이렴, 이철과 결의하여 가재를 기울여 의병을 모아 창의맹약문과 격문을 발하고 진충보국을 맹세했다. 유격장이 된 이경 의사는 왜적의 길목인 유천전투에서 야간에 동지들과 함께 매복하여 잠든 많은 왜병의 목을 자르니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 곳곳에서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규합된 힘을 모아 곽재우 장군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대구 망우당공원에 세워진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 네 분의 의사와 함께 배향되어있다.

이해(李海) 의사는 고성이씨 17세손으로 명종조에 진사에 합격하여 교위 벼슬로 곽재우 장군 진영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도원수 권율 장군의 출사 청유서를 받고 보국진충을 맹세한 후 남원성전투에서 관군에 편성되어 용맹을 떨쳤다. 이해 의사는 평소에 말타기를 잘하여 항상 선봉에 섰으며 권율 장군의 지휘를 받고 성을 사수하다 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히 순국하였다.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여 무덤을 초혼장으로 하였고 평소에 타던 애마의 무덤도 곁에 있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남원 충렬사에 배향되어있다.

이잠(李潛) 의사는 의병을 일으켜 철마산성과 오례산성 사수에 가담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왜군들은 1차 진주성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2차로 9만여 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에 쳐들어왔다. 이러한 전세의 확장으로 진주성 전투에 합류하여 창의사 김천일 휘하에서 적개의병장으로 1만5천의 의병과 같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어 이잠 의사도 6만 군민과 함께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어있다.

이렴(李濂) 의사는 적의 통로인 유천 길목에서 적의 차단을 위해 오례산성 방어에 주력하다 싸움이 장기화됨에 따라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화왕산성 방비에 많은 공을 세우고 영산전투와 정암진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또한 현풍성 수복작전에서는 비슬산의 지세를 활용하여 유격전술의 전개하여 왜군의 이동을 차단하였으며 치열한 접전 속에 산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에 제수되었다. 대구 망우당공원의 임란호국 충의단에 배향되어있다.

이철(李澈) 의사는 형 이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종숙 이경 의사, 종형 이해 의사, 이렴 의사와 서로 연락을 하며 오례산성과 철마산성, 유천을 오가면 주로 고향에서 활동하였으며, 의병장들의 전의를 다지는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하였다. 그 후 곽재우 장군 진영에 합류하여 왜군의 후발부대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가담하였으며 화왕산 사수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 현풍, 영산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청도 일원의 잔류 왜군을 소탕하는데 공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