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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청도읍성(淸道邑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

노촌魯村 2020. 3. 30. 06:28

청도읍성(淸道邑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동삼리, 동천리)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청도읍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570(1880m)이고, 높이는 55(1.7m)이었다고 하나, 일제시대 때 읍성 철거정책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었고, 지금은 성벽의 바닥과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의 평면형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다.

청도읍성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것이었는데, 조선 선조 23(1590)에 돌로 고쳐쌓아 선조 25(1592)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85)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이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 석빙고(보물 제66)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도주관(道州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도주관로 146 (서상리))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청도군을 도주라고도 부른다. 객사 안에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에 절하는 곳인 정청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숙박시설로 되어있다.

1670년 경인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정청은 화양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바닥과 벽이 바뀌었다. 그러나 건물의 나머지는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관아터에는 지방업무, 민사소송을 보던 동헌이 남아 있으며, 이 건물 앞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한 정치를 기린 비가 서있다. 또한 고종(재위 18631907) 때 대원군이 외세침략에 대해 거부하는 의지를 새긴 척화비도 있다.

 

청도척화비(淸道斥和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9.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비의 옆면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청도동헌(淸道東軒.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3.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헌길 15 (동상리))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하나로, 청도지방의 일반행정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조선 영조 13(1737) 경에 지어졌고, 1956년 경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원래 동향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나 옮겨 지으면서 서향으로 바뀌었다. 앞면 7·옆면 3칸 규모의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도주학원으로 사용하였다.

동헌은 지방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 건물이다. 현재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청도 동헌은 관아 건축의 귀중한 연구한 자료가 된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