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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천룡사지(慶州 南山 天龍寺址)

노촌魯村 2020. 6. 22. 09:53

                  

경주 남산 천룡사지(慶州 南山 天龍寺址)

천룡사지가 있는 천룡계곡은 서남산의 제일 마지막 계곡 용장계곡의 다음 계곡이다. 그 정상을 통상 고위산이라고 한다, 천룡사라는 절은 신라 당시에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 아주 존중받았던 곳이다. 그래서 석가만일도량을 열고 국토의 안위를 기원한 곳이 천룡사였다. 절이 천룡사라고 불리게 된 유래, 그리고 이곳을 중수하여 힘썼던 뜻있는 이들의 노력은 삼국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토론삼한집에 말하기를 "계림 땅에 딴 곳에서 흘러온 물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이룬다."고 하였다. 한번은 중국의 사신 악붕귀가 와서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했다.

옛날에 이름을 전하지 않는 시주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천녀. 용녀라고 했다. 부모는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천룡사라고 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 말엽에 이르려 쇠잔해 지고 말았다.

유명한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이 젖을 먹여 키웠다는 최은함의 증손이었던 시중 최제안이 이 절을 새로 일으켜서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그는 또 조정의 명을 받들어서 신서의 원문까지 절에 남겨 두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여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나타내었다고 전한다.

중국 사신 악붕귀는 사천왕사의 허실을 탐지하기 위하여 왔던 사신이었다. 따라서 천룡사는 적어도 신라 삼국통일 이전부터 있었던 절이라고 볼 수 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천룡사가 언제 황폐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최재안의 중건은 고려 정종 7년(1040) 이었으니, 신라 말에 황폐되었던 절을 고려 초에 중수했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폐탑은 최근에 복원되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도 남았있다. 그리고 석조 및 맷돌 등 많은 석재가 있다.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慶州 南山 天龍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1188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번지)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복원 전

'경주남산의 불적'에서 갭쳐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