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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분황사(芬皇寺)

노촌魯村 2020. 6. 13. 08:31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 사적 제548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경주 분황사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경역 내·외부를 확인하였는데, 창건 당시 신라 최초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 후 세 번의 중건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 세 곳에 법당을 배치하는 양식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왕경(경주)에 조성되었던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이며,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장기간의 체계적 발굴을 통해 가람의 배치 양상과 그 변화상뿐만 아니라 경역의 대부분을 규명한 사찰로써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 칠처가람(七處伽藍): 신라 불국토설(佛國土說)의 하나로, 경주에 있었던 7개소의 가람터(지금의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암사)(출처 : 문화재청)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국보 제30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분황사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은 보광전에 모셔져 있으며 높이는 3.45m이다.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의 뚜껑 안쪽에는 “건릉 삼십구년 을미 사월 이십오일 조성야”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이 입상이 조선 영조 5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입상의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머리카락은 석회를 뭉쳐 나선형으로 만들었다. 상투 모양의 육계는 낮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어깨에 걸쳐 두껍게 만들어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군의는 꽃 모양으로 접어 띠처럼 둘렀으며, U 자형으로 층을 이루어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서 3단으로 접어 마무리하였다.

대좌는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판석으로 대신하였으며,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이것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쫒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구황동 분황사에서는 모전석탑 곁에 비석 대좌가 있다. 위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홈이 패어 있고, 대좌 윗면에 ‘此和靜國師之碑趺(이것은 화쟁국사 비석의 받침)’이라고 새긴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 있다. 원효에게 화쟁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린 고려 숙종이 세운 추모비의 대좌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분황사에 있는 화쟁대사 즉 원효대사의 비석을 보고 원효의 삶을 추모하여 ‘무쟁비’(無諍碑)라는 시를 남겼다.

                 

諍碑(무쟁비) - 김시습(金時習) -

 

君不見(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했나

 

新羅異僧元旭氏(신라이승원욱씨)

신라 이승 원욱이

 

剔髮行道新羅市(척발행도신라시)

머리 깎고 신라 저자에 도를 행한 것을.

 

入唐學法返桑梓(입당학법반상재)

당에 가서 불법 배워 고국으로 돌아와

 

混同緇白行閭里(혼동치백행여리)

절과 세상을 넘나들며 민간에 행하여

 

街童巷婦得容易(가동항부득용이)

거리 아동과 아녀자도 쉽게 깨우치니

 

指云誰家誰氏子(지운수가수씨자)

그를 두고 아무개 집 아무개라 가리킬 정도였어라

 

然而密行大無常(연이밀행대무상)

그러나 큰 무상의 도를 가만히 행하여

 

騎牛演法解宗旨(기우연법해종지)

소타고 법을 펴서 불교의 진리를 풀이하니

 

諸經疏抄盈巾箱(제경소초영건상)

불경의 풀이 글이 책 상자에 가득해

 

後人見之爭仰企(후인견지쟁앙기)

후인들이 보고서 다투어 따랐도다

 

追封國師名無諍(추봉국사명무쟁)

국사로 뒤늦게 <무쟁>이라 시호 내려 하여

 

勒彼貞珉頗稱美(륵피정민파칭미)

곧은 돌에 새겨 칭송하였도다.

 

碣上金屑光燐燐(갈상금설광린린)

비갈 위 금가루는 광채가 찬란하고

 

法畵好辭亦可喜(법화호사역가희)

불화와 문장도 역시 좋도다.

 

我曹亦是善幻徒(아조역시선환도)

우리도 환어를 잘하는 무리라서

 

其於幻語商略矣(기어환어상략의)

환어에 대하여는 대략 아노라.

 

但我好古負手讀(단아호고부수독)

다만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뒤서고 읽을 뿐이라

 

吁嗟不見西來士(우차불견서래사)

아아, 서쪽서 오신 부처님 보지는 못하는구나.

                  

경주구황동당간지주(慶州九黃洞幢竿支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양 기둥 사이에 거북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