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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 - 자경(自警) -

노촌魯村 2020. 9. 6. 17:49
     

박인로 <자경(自警)>

 

명경(明鏡)에 틔 끼거든 갑 주고 닷글 줄

아희 어룬 업시 다 밋쳐 알건마는

갑 업시 닷글 명덕(明德)을 닷글 줄을 모라나다

 

성의관(誠意關) 돌아들어 팔덕문(八德門) 바라보니

크나큰 한길이 넓고도 곧다마는

엇지타 진일(盡日) 행인(行人)이 오도 가도 아닌 게오

 

구인산(九仁山) 긴 솔 베혀 제세주(濟世舟)를 무어 내야

길 잃은 행인을 다 건네려 하엿더니

사공도 무상(無狀)하야 모강두(暮江頭)에 버렷나다

 

*성의관: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관문. *팔덕문: 여덟 가지 덕을 갖춘 문. *진일: 온종일. *제세주: 세상을 구하는 배. 

*무상하야: 변변치 못하여. *모강두: 저물어 가는 강가.

    

도계서원은 조선 인조~선조 때의 노계 박인로 선생(1561-1642)의 사후에 후학들이 그의 덕을 기려 선생의 고향인 도계에 세운 서원이다. 노계선생의 산소가 바로 지척에 있고, 서원 입구의 좌측에는 노계가(蘆溪歌)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박인로(朴仁老, 1561-1642)는 조선의 무인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翁)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영천(永川)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태평사(太平司)》를 지었다.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거제도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뒤에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1630년(인저 8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박인로가 남긴 중요한 작품으로는 《누항사(陋巷詞)》,《선상탄(船上歎)》등이 있다. 부모상에 다같이 3년씩 여묘(廬墓)를 살아 그 효심도 매우 깊었다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