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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김천

호국승護國僧 사명대사四溟大師 -직지사 사명각四溟閣-

노촌魯村 2021. 8. 11. 09:55

사명각은 사명대사의 영탱을 모신 곳으로 정조11년(1787년)창건. 1975년 박정희 대통령 지원으로 중창했고 현판글씨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사명대사는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이후에 30세에 본사의 주지가 되셨고 임진왜란 때 구국선사로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로 독립된 건물에 영탱을 모시고 있다.

        

영정에는 사명이 의자에 앉았고 두 명의 시좌승이 곁을 지키고 있다. 왼쪽 스님은 쇠로 된 선장(禪杖)을, 오른쪽 스님은 보검을 들었다.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 1544∼1610).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출처 : 한국콘덴츠진흥원)

                     

사명각四溟閣  벽화壁畵

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명당이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에 내심 꺼림칙했으나 여러 술수를 꾸며 그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조선 사신이 오는 길목에 360칸짜리 긴 병풍을 세워두고 거기에 1만 1천 귀의 한시(漢詩)를 가득 써놓았다.

사명당은 말을 타고 유유히 오다가 병풍의 글을 한 번 쭉 훑어보았다.

왜왕은 사명당을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360칸 병풍에 쓴 글을 다 보았겠으니 한 번 외워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명당은 “그만한 것쯤 외우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더니 1만 9백여 귀에 달하는 시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줄줄 다 외웠다. 다만 마지막 병풍 한 칸의 글귀는 외우지 않았다.

왜왕이 그 사유를 물은즉, “접혀 있던 것까지야 어떻게 볼 수 있었겠소.”라고 대답했다. 왜왕이 사람을 시켜 이를 확인해 보니 과연 마지막 한 칸은 펴져 있지 않은 채로 있었다. 왜왕은 그의 비상한 재능에 그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사명대사를 죽이려는 생각에 쇠로 만든 방에 가두고 불을 사정없이 태웠습니다.

그리고 불이 다 식은 다음에 문을 열었습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사명대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계셨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얼어 매달려 있었다.

 

임란왜란 후 1605년 3월 선조 임금의 명으로, 교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끌려간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