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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 탄생지誕生地

노촌魯村 2022. 1. 18. 01:28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 탄생지誕生地(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83번지)

포은 정몽주 생가는 영천시에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83번지 일대에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2015년 10월에 준공했다.
포은 정몽주 생가터 추정지에는 생가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이 드러나 있으며 인근에서 기와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여러 점 발견되었으며, (재)계림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조사한 결과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것으로 각각 확인됐다.
또한,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22권 경상도 영천군조 인물편과 포은의 문집 「교서관본(校書館本)」과 서애 류성룡이 지은 「연보고이(年譜攷異)」에도 "지원3년 정축(1377년) 12월 무자일에 선생이 영천군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상
성림문聖臨門
광풍제월(光風霽月) : 마음이 넓고 쾌활하며 시원스러운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부엌
본채
존양당存養堂
영정각影幀閣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영정각影幀閣)

정몽주의 출생 설화 및 우항리 울목마을

정몽주는 어머니인 변한국대부인 영천 이씨가 임신 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화분은 다 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난초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나 낳았기에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아홉 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검은 용이 뜰 가운데 배나무를 기어올라 황금빛 비늘은 번쩍이며 배를 따 먹기에 유심히 쳐다보니 용 또한 머리를 쳐들고 빙그레 웃는 모습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이에 뒤꼍으로 가 보니 어린 몽란이 배나무에 올라 앉아 배를 따 먹다가 어머니를 보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흡사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이었기에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고쳤다고 한다.

정몽주가 관례(冠禮)를 치를 즈음에 아버지 정운관(鄭云瓘)이 꿈속에 신선을 만나 무릎을 꿇고서 “어디서 오신 어른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신선이 대답하기를,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 몽룡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아버지는 곧 관례를 치를 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고 하여 몽주(夢周)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정몽주가 태어난 곳은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울목[鳴項]마을인데, 이 마을을 울목이라 부르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자호천(紫湖川)과 운주산(雲住山)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졌다.

둘째, 당시 도로에서 먼 골짜기에 있어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도로를 지나는 말울음 소리는 어렴풋하게 들리나 그 방향까지는 알 수가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셋째, 정몽주가 태어나자 학이 울며 날아갔다고 해서 붙여졌다.

넷째, 정몽주가 강보에 싸였을 때, 매일같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울음을 계속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은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가 아닌가 하여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러던 중 칠날[七日]이 되자 한 점잖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기에 아버지가, “시주는 어렵지 않습니다마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뱃속에서 떨어진 이래로 갓난아기가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어 걱정이오니 한번 봐 주십시오.” 하자, 스님이 방을 보여 달라며 정몽주가 누워 있던 방에 들어와서 사방을 살펴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도련님이 우는 것이 아니고 벽에 쓰여 있는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지(白紙)로 도배를 하면 울음을 그칠 것입니다.”고 하였다. 정몽주의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스님의 말대로 흰 종이로 도배를 하고 나니 비로소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정각影幀閣에서 본 포은 정몽주선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