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木鐸
-물고기 등에서 자라는 나무-
어느 절에 덕이 높으신 스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하루는 그 스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난 물고기가 뱃머리에서 울었다.
스님이 보니 전생에 방탕한 제자였다. 가여운 생각이 들어 그를 위해 수륙천도재水陸遷度齋를 베풀어 물고기 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제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서 치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며 또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 해탈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어가 만들어 졌으며 이것이 목탁으로 변형되어 오늘 날 여러 행사에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법구가 되었다.
중국 선종 사찰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목탁木鐸은 목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형태 또한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으나 긴 형태를 취한 목어와는 달리 둥근 형태를 취한 앞부분의 긴 입과 입 옆의 둥근 두 눈으로 물고기형태를 상징하게 된다. 그 소리를 듣고 목어의 유래에 얽힌 전설이나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를 연상하여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만드는 재료는 대추나무가 가장 좋으나, 박달나무·은행나무·궤목 등을 많이 사용한다.
수륙천도재水陸遷度齋의 의미 :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Uposadha를 한자어로 번역한 재(齋)는 본래, 신·구·의 3업(三業)을 맑게 하고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재는 부처님께 정성을 바치고 경건하게 귀의하는 신앙을 표현하는 의식(儀式)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재는 부처님께 정성을 올린다는 점에서 불공(佛供)과 혼동되어 쓰인 시기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재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불공이 살아있는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려는 소망인데 반해 재는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비는 천도(遷度)의 뜻이 두드러진 의식이 되었습니다.
수륙재는 허공중에 흩어져 극락왕생을 못하고 있는 모든 망령(亡靈)을 천도하는 재입니다. 수륙회(水陸會)라고도 하며 물이나 육지에 있는 모든 고혼(孤魂)과 아귀에게 공양하는 의식입니다.
양나라 무제의 꿈에 신승(神僧)이 나타나 말하기를 「육도(六度 : 보살이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이른다.) 사생(死生 : 죽음과 삶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중생들이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거늘, 어찌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그들을 제도하지 않는가? 그들을 제도하는 것이 공덕중의 으뜸이 되느니라.」
해서 지공(誌公 418-514)에게 명하여 「수륙의문(水陸儀文 :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글)」을 짓게 하여 금산사에서 재를 지낸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971년)때 수원 갈양사에서 혜거국사가 처음으로 시행하였으며, 지금도 여러 절에서 이 수륙재를 지내고 있습니다.(출처 : 조계사)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達城 龍淵寺 金剛戒壇. 보물 .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915)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基壇)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계단(戒壇)이란 수계의식, 득도식 등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지는 신성한 곳으로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고 있으며, 계단의 앞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전각을 설치하였다. 통상 적멸보궁은 일반적인 전(殿)이나 각(閣)보다 법당으로서의 격이 높은데, 내부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법당 바깥에 설치한 계단이나 사리탑에 모셔진 진신사리를 예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함(函)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하였으나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탑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된 것이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방형의 이중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여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수호하게 하였으며, 하층기단에는 네 모서리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배치하였다. 이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에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부가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다만 도난의 우려가 있어 사천왕상 4구는 별도 보관 중이고 현재 현장에는 모조품이 배치되어 있다. 계단 주위를 두르는 석조 난간은 1934년에 세워진 것이다.
한편 용연사와 같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643년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舍利)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된다.(달성군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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