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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노촌魯村 2022. 2. 6. 18:49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 혜가는 자신의 열의를 보이기 위해 스스로 한쪽 팔을 잘라 바치고 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소지(燒紙: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희고 얇은 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림 또는 그 종이).단지(斷指:손가락을 자르는 것)와 단비(斷臂:팔을 자르는 것)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려는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즉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 적인 가르침이 선(禪)수행이라고 여겼기에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達磨)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慧可) 대사, 3조 승찬(僧璨) 대사, 4조 도신(道信) 대사, 5조 홍인(弘忍)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慧能)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西天) 28조와 동토(東土)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달마 대사는 스승이던 반야다라 존자의 열반을 마지막으로 인도 내의 교화를 제자들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양(梁)나라의 왕이던 무제(武帝)를 만났으나 무제는 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사는 그 길로 낙양(洛陽)의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面壁)하며 시절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렸다.

대사의 말없는 교화가 9년째이던 어느 해 엄동설한에 유불선(儒佛仙)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광은 춥고 눈내리는 긴 겨울밤을 인내로 지새웠다.  

대사가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짖자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척도를 보였다. 이에 땅에서 파초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대사는 신광의 입문(入門)을 허락하여 혜가(慧可 487-593)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단비도는 벽화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회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내용을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글· 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 소장)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비슬산용연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천년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로서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명령으로 인잠(印岑)· 탄옥(坦玉). 경천(敬天)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 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영산전· 명부전·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선열당. 심검당. 유정당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금강계단(보물 제539호)이 있고, 1728년 세운 다포식 맞배지붕의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과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13호), 묘법연화경 권4~7(보물 제961-3호) 이 외에도 3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과 14기의 부도 등이 있다.

특히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영남지방의 영험 기도처로 부처님의 훈훈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출처 : 용연사)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大邱 龍淵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大邱 龍淵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대구광역시 달성군 용연사길 260 (옥포면, 용연사))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大邱龍淵寺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및 腹藏遺物)’은 복장 후령통을 비롯하여 조성발원문, 복장전적 등 조성 당시의 원형을 갖추고 있어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165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 봉안사찰, 조성주체, 제작자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17세기 불상연구의 기준작이 된다. 또한 1762년의 중수개금기(重修改金記)까지 포함하고 있어 불상의 중수개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에 보이는 귀염성이 느껴지는 얼굴, 당당하고 장대한 신체비례,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직한 선묘, 무릎 앞에 넓은 주걱모양의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밀도 높게 새긴 세밀한 주름 등은 조각승 도우(道祐)의 양식적 특징으로 파악된다.

도우는 17세기 중엽경의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무염(無染)의 조각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얼굴모습이나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자신만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무염의 계보를 잇는 도우가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도우 작품의 시기별 양식 변화의 양상 및 17세기 시대적인 특징인 대중적인 평담미와 종교성 속에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대세지보살좌상 발원문01(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불좌상 발원문(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중수개금원문01(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