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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전선사太顚禪師와 한유韓愈 그리고 홍련紅蓮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노촌魯村 2022. 2. 7. 00:26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 '태전선사太顚禪師와 한유韓愈 그리고 홍련紅蓮' 관련 벽화

태전선사太顚禪師와 한유韓愈 그리고 홍련紅蓮

 

중국 당나라 때 한유(韓愈, 韓退之, 768~824)는 문장이 뛰어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며, 당헌종의 신임도 두터워서 한림학사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지만, 헌종이 인도에서 부처님의 뼈사리를 모셔오는데, 크게 관심을 보여 동참하자, 그것을 비방하는 불골표(佛骨表)를 올려서 헌종의 미움을 받고, 장안에서 800리 떨어진 시골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과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한유는 조주에 훌륭한 태전선사(太顚禪師, 732~824)라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스님을 타락시켜 불교가 하찮은 것임을 밝히려고, 가장 젊고 예쁜 홍련(紅蓮)이라는 기생에게 "백일의 기한을 줄 것이니, 태전선사라는 중을 파계(破戒) 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칠 것이니라."라고 했다.

홍련은 생각하기를, “그까짓 중하나 꾀는데 뭔 100일씩이나 걸리나” 라며 우습게 생각하고는 예쁘게 단장하고 태전선사가 계시는 축륭봉으로 올라갔다. 가서는 "100일 기도를 하러 왔다"고 말씀 드리고 태전선사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100일이 다 가도록 어쩌지를 못하고 오히려 태전선사의 수행에 감화되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겁이 난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예절을 갖추어 삼배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실은 제가 이곳의 자사인 한유의 명으로 큰스님을 타락시키고자 왔는데, 오늘까지 타락시키지 못하면 저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큰스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그러자 태전선사는 홍련에게 하얀 속치마를 내어 펼치라 하고는 아래의 게송(偈頌, 선시)을 써 주면서, “이곳 자사가 문장이 뛰어나다고 하니, 이 글을 보여주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홍련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작별하고는 조주자사인 한유에게로 가서 태전선사의 게송이 적힌 치마를 펼쳐 보이니, 한유는 한 번 읽고는 감탄하면서 생각하기를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음)이구나. 내 친히 가서 만나봐야되겠다.”

 

십년불하축융봉(十年不下鷲融峰)

관색관공즉색공(觀色觀空卽色空)

십년 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고 공일뿐이었네.

     

여하조계일적수(如何曹溪一適水)

긍타홍련일엽중(肯墮紅蓮一葉中)

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을

홍련의 한 잎사귀에 떨어뜨리겠는가.

 

한유가 태전선사에게 가니, 선사가 묻기를 “어떠한 불교경전을 읽어보았습니까?” “뭐 특별히 읽어 본 경전이 없습니다.” 그러자 태전선사는 “문장(학문)으로 이름 높은 자사께서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불교를 비난하셨습니까?” 그래서 한유는 자신의 잘못됨을 뉘우치고 태전선사에게 귀의하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에 관한 문장도 많이 썼다고 한다.(출처 : 허공. 허공처럼 살자)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비슬산용연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천년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로서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명령으로 인잠(印岑)· 탄옥(坦玉). 경천(敬天)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 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영산전· 명부전·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선열당. 심검당. 유정당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금강계단(보물 제539호)이 있고, 1728년 세운 다포식 맞배지붕의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과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13호), 묘법연화경 권4~7(보물 제961-3호) 이 외에도 3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과 14기의 부도 등이 있다.

특히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영남지방의 영험 기도처로 부처님의 훈훈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출처 : 용연사)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大邱 龍淵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大邱 龍淵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대구광역시 달성군 용연사길 260 (옥포면, 용연사))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大邱龍淵寺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및 腹藏遺物)’은 복장 후령통을 비롯하여 조성발원문, 복장전적 등 조성 당시의 원형을 갖추고 있어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165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 봉안사찰, 조성주체, 제작자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17세기 불상연구의 기준작이 된다. 또한 1762년의 중수개금기(重修改金記)까지 포함하고 있어 불상의 중수개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에 보이는 귀염성이 느껴지는 얼굴, 당당하고 장대한 신체비례,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직한 선묘, 무릎 앞에 넓은 주걱모양의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밀도 높게 새긴 세밀한 주름 등은 조각승 도우(道祐)의 양식적 특징으로 파악된다.

도우는 17세기 중엽경의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무염(無染)의 조각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얼굴모습이나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자신만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무염의 계보를 잇는 도우가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도우 작품의 시기별 양식 변화의 양상 및 17세기 시대적인 특징인 대중적인 평담미와 종교성 속에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대세지보살좌상 발원문01(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불좌상 발원문(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중수개금원문01(출처 : 문화재청)
대구 용연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출처 : 문화재청)
용연사 극락전 불상 후벽 뒷면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