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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固城 옥천사玉泉寺

노촌魯村 2023. 8. 4. 14:21

연화산蓮華山 옥천사玉泉寺 일주문

옥천사(玉泉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쌍계사 진감(眞鑑)선사 대공탑비(大空塔, 887년 건립)에 쓰기를,『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으나 근처에 옥천사라는 절이 있어 한강왕이 쌍계사라 고쳐 제액(題)을 내렸다』고 하고 있어 헌강왕 재위기간(875-885) 이전부터 이곳 옥천사가 존재했음이 확실하다.

의상대사는 당나라 종남산 지엄화상으로부터 8년간 화엄경을 배워 돌아온 후 해동에 화엄학을 펴기 위해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을 창건하였는데, 그 때 건립된 사찰의 대부분이 반 신라적 기질이 농후한 옛 고구려, 백제의 수도 근교에 배치되어 있다. 이곳 고성군에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인 옥천사가 창건된 것은 이 지역이 소가야 지역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한 진흥왕 23년 (562)까지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항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소가야지역 주민들을 선무하기 위하여 옥천사를 창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대사가 통섭만법 명일심(統攝萬法 明一心)의 화엄사상으로 우리민족의 사상을 통일하고자 한데 비추어 신라 조정은 통일된 3국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신라 조정에 복종케 하는 데 뜻이 있었다. 양자의 목적은 다르지만 사찰을 건립하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므로 의상대사는 신라조정의 도움을 받아 <화엄전교십찰>을 창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화엄전교 십찰>이 성립된 시기는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의상대사의 제자들에 의하여 완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옥천사의 창건연대를 부석사의 창건연대인 676년으로 보는 것은 그 전후에 옥천사가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옥천사 역사는 잘 남아 있지 않고 신라 말인 효공왕 2년(898)에 창원 봉림사를 창건한 진경국사 심희(眞鏡審希)가 이 절에 들어와, 먼저 주석하고 있던 낭림(郞林) 선사와 도반을 맺고 가람을 크게 수축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1950년 10월 19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옥천사는 그 많은 전답을 고스란히 소작인들에게 넘겨주는 대 변혁이 일어났다.

당시 30리 이내의 불량답(佛糧畓)은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규정이 있어 다른 사찰에서는 일부 전답을 구제 받기도 하였으나 옥천사는 여러지 사정으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전답 한 평 건지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빈찰(貧刹)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절은 재정적으로 어렵게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3대 부자고 3대 가난뱅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흥한자쇠하고 쇠한 자흥하는 것은 세속이나 사찰이나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부찰이던 절이 60년 동안 빈찰로 전락하여 고생했으니 이제 다시 부찰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통이 불편하던 옥천사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대전에서 2시간, 서울에서 4시간이면 올 수 있게 되었으니 경남의 오지에 숨겨져 있던 옥천사가 이제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장각(寶藏閣)옥천사 유물전시관인 보장각(寶藏閣)에는 보물 제495 호 "임자명 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한 120여 점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산내에는 청련암, 백련암, 연대암, 적멸보궁의 4암자가 있으며 포교당으로는 고성읍에 보광사가 있다. 그밖에 옥천사 앞으로 등록된 비구니 암자로 하동군 횡천면에 낙서암이 있고 고성읍에 무등선원이 있다. 특히 백련암은 선방으로 유명했던 암자로 6.25를 전후하여 인곡스님, 설석우스님, 관응스님, 서옹스님, 월하스님, 혜암스님 같은 큰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던 유서 깊은 선원이다.옥천사는 불교정화운동의 기수였던 청담스님이 출가한 삭발본사로 유명하다. 옥천사에는 청담스님의 사리탑과 탄허스님이 직접 짓고 쓰신 탑비가 있다.

옥천사는 반개연화(半開蓮華)의 연화9봉이 감싸고 있어서 항상 안온한 기운이 감도는 명당 길지(明堂吉地)이다. 이 절에서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한 인사가 50명이 넘고 장관이 여러 명 나왔다. 이 절의 아미타삼존불께 기도하여 부자가 되거나 득남(得男)한 사례는 100례가 넘는다. 옥천사 일원은 경상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을 포함한 연화산 일원은 "경상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1911년 일제가 <사찰령>을 공포하고 31본산을 정할 때 옥천사도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와 더불어 대본산으로 지정 되었지만 당시 주지 채서응(蔡瑞應)스님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석, 대본산 지정을 극구 사양함으로서 지정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옥천사 승려들은 대본산 지정이 안 된 것을 잘 된 일이라고 하며 칭찬이 자자했다한다. 그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과 같이 60년 동안 닥종이 부역에 혼이 난 옥천사 승려들이 관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부반응을 보였던데 원인이 있었다.

옥천사는 조선 후기에 부찰(富刹)이었던 만큼 1920년 경 진주 옥봉에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포교당을 창건, 광복 전에는 "통도사포교당” , 광복 후에는 "연화사(蓮華寺)"라 불렀다. 그것은 옥천사의 배산이 연화산이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에는 개천면 예성리와 명성리 중간에 옥천중학교를 건립하였으나 인가를 받지 못해 무산 되었고 잇달아 옥천사 경내, 지금의 청담스님 사리탑이 있는 자리에 옥천중학교를 설립하여 일시 중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옥천사 스님들을 일본의 東洋大學, 龍谷大學, 東京高等師範등에 유학을 보내 15인이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은 귀국하여 대개 주자를 맡거나 교육계로 진출하여 교장이나 포교사로 활약했다. 일제 강점기시 일본 경찰은 옥천사 스님들을 지식인들로 보고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는데 백초월스님 같은 분은 서울의 용성스님과 손잡고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다가 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옥천사는 지금 쌍계사의 수석 말사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통도사의 수석 말사였다. 그러나 옥천사 주지는 항상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선출하여 본사의 승인을 득하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통도사에서 주지를 뽑아 파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옥천사의 위상과 인물은 대단하였다.

1921년 세진교(洗塵橋 , 무지개다리) 비문을 쓴 대 강백 박한영 스님은 “오호! 교남(嶠南 : 경상도)에 그 옛날 웅장했던 崇福寺(경주),黃龍寺(경주), 嚴川寺(함양), 斷俗寺(산청단성)와 같은 대찰들이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외로운 찰주와 부서진 탑만이 무심한 뜬구름과 서산 낙조에 그림자 지고 있는 이 마당에 오직 옥천사만이 인간세상의 세월을 벗어난 듯 법등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에 석덕스님들과 주민들이 시주하여 公衆을 위하여 다리를 가설하였다하니 실로 천 년을 이어오는 유풍이 아닐 수 없으며 비석에 새겨 송덕해도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7세기에 창건된 옥천사가 1,300년이 지나도록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숭조선 후기에 옥천사는 부찰(富刹)이었다. 사찰답 800여 두락을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5:5의 비율로 도지(수)를 받으면 1,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산판은 560 정보로 산지기가 5-6명이나 되었다.

사찰답이 많은 이유는 농민들이 산판을 논으로 개간한 후 3년간 자영한 후 사찰답으로 귀속 받은 것이 많지만, 스님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도지 받은 추곡으로 계속 논을 불려나갔기 때문이다.

절이 부찰이었던 만큼 신중의 승려 수는 300명~ 100명에 이르렀다. 현재도 법당이 9개나 되고 각종 유물이 400점 이상 남아 있으며, 각종 현판이나 기문이 92점이나 남아 있다. 기문이 이렇게 많이 남아 조선후기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사례는 드문 일이다.

1950년 10월 28일 단행된 농지개혁 때 800 두락의 사찰답은 소작인들의 손에 전부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한 평 없는 빈찰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임야는 아직도 건재하다.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대가면 등 4개면에 565ha의 임야가 사찰림으로 등기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이룩된 주요 불사를 보면, 효종 5년(1654)에 대웅전을 건립했고, 숙종27년(1721)에 대종(大鐘)을, 영조 40 (1764)에 자방루를, 영조50년(1774)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순조4년(1808)에 괘불을, 고종원(1864)에 대웅전을 각각 조성하였다.(출처 : 옥천사)

천왕문天王門
청담스님 사리탑과 탑비

청담스님(1902-1971)의 속명은 찬호(讚告), 법명은 순호(淳浩), 법호가 청담(靑潭) 이시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종정을 두 번 역임하셨다. 스님은 진주 태생으로 진주농업학교 재학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하여 민족차별에 반발, 스트라이크를 주도하는 등 요시찰 학생으로 주목받았다.

어느 해 여름, 진주성 서장대에 바람을 쐬러 올라갔다가 바로 밑에 있는 호국사에 내려가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는데 스님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학생, 물이 시원하지요?" "예, 시원합니다. “시원한 것은 물이 시원한 것이요? 학생 마음이 시원한 것이요?" 이로부터 설왕설래 끝에 불교란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스님은 포명(抱明)스님으로서 유명한 불교학자였다 스님은 진농을 졸업하고 25세 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병고현 송운사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등 행자로서 고행하였다. 귀국한 26세 시 고성 옥천사에 주석하시던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出家得度)하였다. 한영스님이 서울 개운사로 옮겨가 강원을 열자 스님은 한영스님으로부터 이력과정을 이수하였다.

스님은 학인 시절인 27세부터 부패한 불교를 혁신해야겠다는 뜻을 품고 운허스님 등 50여 명의 학인들과 함께 개운사에서 전국학인대회를 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스님은 멀리 만주의 수월스님(水月 : 경허스님의 제자, 천수다라니를 외워 불망염지를 얻은 도인)을 찾아뵙고 서래밀지(西來密旨)를 물었다. 35세 시에는 충남 정혜사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참선 수도하신 것을 비롯 20여 년 동안 전국의 선방을 돌며 참선 수행하셨다.

36세시 만공스님으로부터 올연(兀然)이라는 법명과 함께 전법게를 받고 게송 한수를 읊었다.

上來佛祖鈍癡漢위로부터 내려오는 불조는 모두 둔하고 어리석은 이들

安得了知然邊事불가에 전해오는 주변잡사를 깨쳐 알기나 했을까?

若人問我何所能만일 어떤 이가 내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겠느냐 물으면

路傍古塔傾西方길가에 옛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가 하리

이후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대승사, 봉암사 등 전국의 선원을 참방하며 참선 정진하셨고 6.25 때는 고성 문수암에서 10년 동안 정진하셨다. 스님이 전국의 선방을 참방하며 만행하던 시절, 이 절의 노장에게 가서 "그동안 무슨 공부를 했소?" 하고 물으면 배울 것이 있었고, 저 절의 노장에게 가서 물어도 배울 것이 있었다고 술회하셨다. 스님은 정좌하면 말이 없으셨고 입을 열면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셨다. 기독교를 믿던 춘원 이광수와 3일 밤낮으로 우주, 인생에 관한 이론투쟁을 벌인 끝에 춘원을 불교로 돌아서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불교 정화 직후인 1950년대 말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겸 해인사주지로 부임하여 도제양성에 진력하셨는데 어떻게 이론이 정연하시든지 아침 공양 끝에 소참법문으로 시작한 대중공사가 사시마지 때까지 계속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1954년 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대회를 열어 불교정화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400명의 비구들과 함께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전국의 대찰에는 결혼한 승려들이 사찰에 출퇴근하면서 가정 돌보기에만 힘쓸 뿐 불교 전래의 수도는 뒷전이었기에 <불법에 대처없다!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청정 비구들이 대찰에 거주하면서 불교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구, 대처 양측의 협의로 통합종단이 들어서자 스님은 1966년 제2대 종정을 맡으셨다. 스님은 아무리 작은 법회에서 법문을 청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불원천리 찾아가 법문하셨고, 아무리 어린 초행자가 인사할지라도 합장 공경으로 답례하였으며, 매사에 참고 견디며 인욕하는 육바라밀 수행에는 제1인자였다. 항상 종단과 4부대중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지식인, 대학생들에게 마음 깨치는 공부를 하라고 역설하셨다.

1969년 삼각산 도선사를 확장하여 호국참회도량을 개설, 수천 신도들이 참회토록 하였고 1969년 총무원장에 취임하여 종단발전에 헌신하시다가 1971년 11월 15일 홀연히 입적하셨다. 세수 70세, 법랍 45하(夏). 삼각산 도선사 다비장에서 다비하니 오색찬란한 사리 15과가 출현하여 출가본산인 옥천사와 노년에 주석하시던 도선사, 6.25 때 10년 동안 수행하시던 문수암 등 3개 사찰에 사리탑과 탑비를 세웠다. 스님은 진주농업학교가 낳은 위대한 인물이요, 옥천사가 낳은 위대한 구도자였으며, 전 국민이 존경하는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옥천사에서는 조사전을 짓고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현재 스님의 손제자들이 옥천사를 수호하고 있다.(출처 : 옥천사)

청담스님 사리탑
청담스님 탑비
청담스님 탑비(뒤편)
청담스님 사리탑 상사화 2023.8.2
청담스님 사리탑  수련  2023.8.2
청담스님 사리탑 연봉오리와 잠자리 2023.8.2
청담스님 사리탑 수련 2023.8.2
범종각
자방루滋芳樓

고성 옥천사 자방루(固城 玉泉寺 滋芳樓. 보물.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고성 옥천사 자방루」는 상량문 등 기록에 따르면 1664년에 법당 맞은 편에 위치한 정문(正門)으로 처음 건립되었고, 1764년에 누각형태로 중창되어 ‘정루(正樓)’ 또는‘채방루(採芳樓)’라 지칭하였다. 옥천사 사역 내로 진입하는 길은 자방루 양쪽에 있는 출입구를 이용하는 방식(隅角出入, 문루 아래를 통하지 않고 옆으로 출입하는 방식)이다. 정면에는 ‘옥천사(玉泉寺)’ 라는 편액이, 배면에는 ‘자방루(滋芳樓)’ 가는 편액이 걸려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5량가 자방루는 대웅전에 비해 큰 규모로 누하주(樓下柱, 누마루 밑 기둥) 없는 단층 전각의 구성을 하고 있으며, 내부는 고주(高柱, 내부기둥)를 두고 통간(通間, 내부 벽체가 없음)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방루 앞으로 외정(外廷, 바깥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면의 고저차를 극복하기 위해 158cm가량의 자연석 석축을 조성한 후, 그 위에 60cm 높이의 기단을 다시 설치하였다. 공포는 익공형(새 날개 모양의 단순한 공포) 공포로 지붕의 연목이 노출되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자방루의 정면의 모든 칸에는 판문(板門)을 두어 개방과 폐쇄를 조절 가능하게 하고 있다. 대웅전을 마주하고 있는 배면에는 76cm 높이의 난간을 설치하여 개방하였다.

자방루는 평면구성이 내부 고주가 종단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대웅전 쪽 마루 한 칸을 없애고 외부공간으로 처리했으며, 자방루의 공포와 화반(花盤, 상부 목재를 바치는 부재), 고주 상부 보아지(기둥과 대들보를 연결하는 부재)의 화려한 장엄에서 조선후기 사찰의 누각건축에서 나타난 장엄의 사례 중 손꼽히는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자방루

자방루(滋芳樓) : 자방루(滋芳樓) 글씨는 매우 단정하고 숙련된 명필 글씨이다.

낙관을 탁본하여 판독한 결과 조명채(曹命采 1700-1764)로 되어 있어 영조 때 이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조명채가 옥천사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조명채는 불교에 심취하여 해남 대둔사 환성당 지안(喚醒志安:1664-1729)대사의 비석을 다시 세울 때 비문을 쓰기도 했다. 본관은 창녕,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낸재(蘭齋). 1762년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후에 죽었다. 영조는 그를 애석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봉작을 내렸다.

대웅전에서 본 지방루
대웅전

고성 옥천사 대웅전(固城 玉泉寺 大雄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경상남도 고성군 연화산1로 471-9 (개천면))

천사는 연화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17년(1639)에 다시 지었다.

옥천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석가모니를 모시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 8년(1657)에 용성화상이 다시 지었으며, 그 후에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2단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 앞에는 좌우에 당간지주가 있다.

옥천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법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대웅전 용마루 청기와
대웅전 불상

고성 옥천사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 및 목조대좌(固城 玉泉寺 大雄殿 石造三尊佛坐像 및 木造臺座.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 옥천사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은 1670년에 조성된 옥천사 명부전 석조 지장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대웅전 삼존상도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경옥 혹은 그의 계보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옥의 기년명 불상 사례가 알려진 것이 많지 않으나 그의 특징을 가지는 석조불상이 경상도 지역에 남아 있어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양식흐름과 조각승 계보의 추의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수량은 불상 3구 및 대좌 3점이다.(출처 : 문화재청)

탐진당
적묵당
명부전
명부전 내부
옥천각玉泉閣
옥천玉泉
팔상전
팔상전 내부
팔상전 내부
팔상전 내부
나한전
나한전 내부
나한전 내부
나한전 내부
산령각
독성각
칠성각
칠성각 내부
칠성각 내부
칠성각 내부
조사전
의상대사
삼천불전
삼천불전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