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 경상남도 기념물.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조명군총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결전을 벌이다 희생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무덤이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북진하려던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저항을 받자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퇴각하여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머물고 있었다. 사천지방에는 왜장 시마즈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장군 동일원과 경상도 우병마사 정기룡이 진주를 거쳐 이곳의 적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군진영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재로 인해 적의 역습을 받게되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왜군은 그들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고, 목을 베어 묻어 큰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36㎡의 사각형으로 흔히 ‘당병무덤’, ‘댕강무데기’라고 부르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조명군총은 조선조 선조 30년(1597) 1월에 왜적이 재침하여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 선진리성(당시는 신채라고 함)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칸(35m)의 방형분묘(네모반듯한 무덤)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는 무덤 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쓰인 높이 1m 가량의 표석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1985년 11월 7일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되어 조명군총이라 명명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볼 것 같으면 선조 25년(1592) 임란 4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강화교섭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괴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 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는 울산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또는 수축하고 분주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0월부터 12월 3개월에 걸쳐 왜장 모리길성이 선진에 상륙하여 성을 수축한 것을 그 이듬해인 1598년 왜장 도진의홍 부자가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독 동일원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의 적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하루에는 선진의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에 아군 진중의 폭약궤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으로 적계의 역습을 받게 되어 아군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된 곳이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하였으며, 도진의홍은 그의 부하인 후시래손좌위문에게 명하여 성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진승 졸사파가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 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도진의홍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명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어 3만 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 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 하고 반대로 패자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例事)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38,717명 대 7~8천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 동일원 휘하의 조 · 명연합군의 총병력 약 3만 명보다도 많다는 점은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승물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 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의 38,717명 가운데 10월 1일 전투에서 조.명군 전사자 외에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조.명군 및 이러한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행해 온 왜군의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당한 인근 지방의 양민들의 숫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이 무덤은 근년까지 오랫동안 우리들의 관심밖에 방치되어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병무덤이란 이름과 같이 명군 전사자의 수급만 많이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비록 명군전사자들의 수급이 많이 묻혀있다 하더라도 왜침을 당한 우리나라의 국난을 구하기 위해 원군으로 파병되어 왜적을 몰아내려다 이국 땅에서 목숨을 바친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들은 높이 현창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1983년에 이르러 사천문화원이 중심으로한 사천사회단체협의회가 주관하여 사천시민은 물론 출향인사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무덤 앞에 광장을 마련하였으며 전몰 제385주년 만인 1983년 11월 4일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를 건립하여 제막식을 성대히 하는 한편, 영령을 추모하는 의범을 비로소 가졌다. 따라서 사천시 지원하에 사천문화원이 주관하여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을 기해 연례행사로 위령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에는 도비 지원으로 이곳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나무들을 베어내고 본래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과 남원의 만인의총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반해 이곳 조명군총은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칠백의총이나 만인의총에 못지않게 나라를 위하여 산화한 원혼들이 잠들고 있는 곳으로 특히 이국땅에서 희생된 명나라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어져야 할 것이다. 군총 옆에는 임진란 때 전공공물인 일본 경도 풍신수길묘 앞에 있는 이총(귀무덤)의 원혼을 환국하여 안장한 곳이 있으며, 맞은 편 길 건너 정득열 현감의 비가 진주성 싸움의 처참함을 알리며 서 있다. 한편 2001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성역화사업을 하기 위하여 발굴조사를 하던 중 지난 2004년 6월에 소승자총통과 만력통보가 출토 되었다. 이 중 소승자총통은 철제이며 죽절이 없는 것으로 중국제일 가능성이 높고 또한 총신안에 2발의 탄환이 장전된 채로 출토되어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가 있었던 지역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
- 규 모 : 높이 2.12m 폭 73cm 두께 42cm
- 전면각 :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
- 측면각 : 서기(西紀)일구팔삼년십일월사일세움 (癸亥十月初一日戰歿385週忌)
- 주최 : 社團法人 泗川文化院(院長 吳大泳)
- 주관 : 泗川社會團體協議會(會長 張在薰)
- 협찬 : 泗 川 郡(郡守 梁鍾守)
새삼 덧없어라. 시간(時間)이란 무시종(無始終)의 바람결이며 그 수레바퀴에 실려가 누누(累累)한 청사(靑史)의 책장 밖에서 민들레꽃 솜털인 듯 떠돌이 구름다운 무주원혼(無主怨魂)들이 구천어디메 오갈곳 없음인들 무릇 얼마리오. 저기 당병소(唐兵沼)와 사남(泗南) 화전(花田)의 병둔(兵屯)자리 및 왯골, 왯등 따위로 이름이 남았고 이 일대 선진신성(船津新城)터는 一五九七年 정유(丁酉) 재침(再侵)후 十二月 卄二日에 준공(竣工)시킨 왜장(倭將) 도진의홍(島津義弘)이 十여 달이나 차지했던 자취로서 어언 근 400년(近 四百年)의 춘풍추우(春風秋雨)동안 이곳 선진리(船津里)의 속칭 · 댕강무데기 · 아래 무언의 흙이 된 왜군 명병과 호국전몰(護國戰歿)의 사연들을 되살려 보련다.
앞서 임계양란(壬癸兩亂)으로 이 땅 남북강산(南北江山)의 조야민생(朝野民生)을 짓밟았던 적괴(敵魁) 풍신수길(豊臣季吉)의 무엄한 도이(島夷) 강화3년(講和三年) 교섭의 결렬에 이어 정유년(丁酉年)에 재침(再侵) 북진(北進)하려다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떠나더니 선진신성(船津新城) 안에 농성 하였기 익98년(翌九八年) 무술(戊戌) 9월(九月) 스무날부터 명중로군(明中路軍) 동일원(董一元)과 우리 정기룡군(鄭起龍軍)이 사납게 쳐몰아 망진(望晉), 영춘(永春), 곤양채(昆陽寨)를 차례로 빼앗고 사천읍성(泗川邑城)의 적(敵)도 크게 무찔렀다. 마침내 十月 첫날에 선진왜성(船津倭城)을 다그쳤으나 배수진(背水陣)의 적계(敵計)에 역습당하여 분사(憤死)한 아군(我軍) 일만(一萬)내외의 수급(首級)이 여기 당병(唐兵)무덤에 적의 손으로 장사됐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용군(鄭起龍軍)의 이천이백(二千二百)과 제독(提督) 동일원군을 합쳐 3만6천설(三萬六千說)도 있지만 모국기선봉 7천5백(七千五百)과 좌우익(左右翼) 각 4천(四千)이면 만5천5백(萬五千五百)의 실전주력(實戰主力)과 적수(敵數) 약 8천(八千)의 대결인데 아군진중(我軍陣中)의 병고(兵庫)에서 발생한 화란(火難)에다 동제독(董提督)의 전략(戰略)이 경적(輕敵)의 허(虛)를 범한 후평(後評)마저 있었다.
기승한 흉적(兇敵)은 동지(冬至)달 열여드렛날 병선(兵船) 5백척(五百隻)으로 사천선창(泗川船滄)을 떠나더니 강주해(江州海)를 거쳐 노량(露梁)나루에 이르매 서둘러 여수(麗水)서 달려온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연합군(聯合軍)과 해전사상(海戰史上)에 불후(不朽)할 노량대해전(露梁大海戰)을 치렀다. 이튿날 미명(未明)의 관음포(觀音浦)에서 이통제사가 순국(殉國)한 격전(激戰) 끝에 패잔선(敗殘船) 겨우 5십여척(五十餘隻)을 이끌고 혼비(魂飛)한 적(敵) 도진(島津)이 도망치자 묘도(猫島) 서편(西便)으로 패적장(敗敵將) 소서행장(小四行長) 또한 탈주함으로써 악몽(惡夢) 7년(七年)의 임란(壬亂) 싸움이 선진포(船津浦)를 마지막으로 설욕(雪辱)의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日本)의 고도(古都) 경도(京都)에 왜구(倭寇)들이 전공공물(戰功貢物)로써 묻혀 있던 이총(耳塚)에서 금년(今年) 9월(九月) 한일유지(韓日有志)들이 위령(慰靈)의 향사(享祀)를 가졌거니와 왕정(王政) 한 때의 내우(內憂)가 천추(千秋)의 외환(外患)을 자초(自招)한 공죄(功罪)야 여부간에 강토(疆土)의 북반천지(北半天地)는 아직 잠겨있는 채 우리들 민주공화조국(民主共和祖國)을 세운지라 이제 향민(鄕民)의 미애(微哀)를 모아 먼먼 이국(異國)땅에 불귀(不歸)의 한객(恨客)으로 남은 명대맹방민(明代盟邦民)의 굳은 전우애를 기리며 삼가 조.명연합군위령(朝.明聯合軍慰靈)들의 명복(冥福)을 비는도다.
어즈버 성웅(聖雄) 이순신공(李舜臣公)의 전상독전(戰傷督戰)과 두척의 거북철선까지 신출귀몰(新出鬼沒)턴 성난 선진(船津) 앞바다는 그 분들을 진혼(鎭魂)하여 길이 고요하라. 西紀 一九八三年 十二月 四日 (癸亥十月初一日 戰歿 三八五週期)이 비에 있어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는 글 지었고,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는 글씨 쓰다.(출처 : 사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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