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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노촌魯村 2023. 8. 19. 22:08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공양왕릉, 왕자 석(奭), 우(瑀),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하여 총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장남 정성군 만 기록되어 있고, 태조실록 에는 태조 3년 4월 17일에 공양왕과 두 아들을 반역으로 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공양왕길 43-21])

삼척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추천마을 고돌재에 있다.

공양왕릉, 왕자 석(奭), 우(瑀),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하여 총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에 전하던 공양왕릉 묘역을 광복 이후인 1977년 삼척군수 원낙희, 근덕면장 최문갑이 현재의 봉분 형태로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이를 정비하면서 기초 발굴을 시도하였지만 마을 노인들의 반대로 정확한 분묘 내부 현상 파악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인 우왕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당시 실권자 최영(崔瑩)[1316~1388]을 제거한 후 우왕의 아들을 왕으로 내세웠다가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한 후 살해한다.

당시 정치권력과 군사권을 장악한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왕족 가운데 신종의 7세손으로 정원부원군 균(鈞)의 아들이고, 성품이 온유하고 우유부단하며 이성계와는 사돈 관계에 있고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거절한 요(瑤)를 1389년에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이다.

1391년(공양왕 3) 조준(趙浚)[1346~1403]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고 녹제와 전제를 개혁하여 신흥 세력의 경제 기반을 마련한 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살해되자 이듬해인 1392년(공양왕 4)에 조준, 정도전(鄭道傳)[1342~1398], 남은(南誾)[1354~1398]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은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8월 7일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공양군요의 동생 우(瑀)는 귀의군(歸義君)으로 강등되어 마전군에서 고려 왕가인 왕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또 고려의 왕대비(王大妃) 안씨는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후 공양왕 등을 앞세운 모반의 기운이 있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1394년(태조 3) 3월 14일 공양군, 공양군 동생 우, 공양군 아들 석(奭) 세 명을 삼척 지역으로 옮겨 안치시켰다. 신하들이 계속 공양왕 등 세 명을 포함한 왕씨들을 제거하여 종사(宗社)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거듭된 상소가 있었지만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된 신하들의 상소와 공양군을 앞세운 모반 계획을 접한 이성계는 마침내 삼척 지역에 있는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아들을 교살하게 하였다.[사약을 내렸다는 설도 있다.]

과거 삼척 지역에 속하여 있던 동해시 삼화사에서 매년 10월에 국행수륙재를 설행하고 있다. 삼화사에서 설행되고 있는 국행수륙재의 기원은 조선의 건국 시기로 올라간다.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족을 강원도 삼척부로 유폐시켰다가 교살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민심의 동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 억울하게 죽어간 고려 왕실 왕족과 무주유주(無主有主) 고혼들의 추천(追薦)을 위하여 국행으로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베푼 것이 시원이다. 즉 삼화사에서 국행수륙재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은 1394년(태조 3) 공양왕이 삼척에서 교살된 시기, 즉 그해 가을이다.

그 이듬해인 1395년(태조 4) 2월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국행수륙재를 지내게 하였다는 것은 이곳 삼척과 공양왕릉의 관련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공양왕릉과 관련한 기록이 실려 있는 지리지는 현재 허목(許穆)[1595~1682]이 쓴 『척주지』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편찬된 김종언(金宗彦)의 『척주지』『관동읍지』, 심의승(沈宜昇)이 1916년에 편찬한 『삼척군지』 1940년에 편찬된 『강원도지』 광복 이후 편찬된 최만희(崔晩熙)의 『척주지』와 『진주지』 등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허목의 『척주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라(楸羅)는 부에서 가장 멀어 40리이다. 추라에는 고총(古塚)이 있는데 그것을 왕릉이라 부른다고 한다.

추라 위쪽은 궁촌(宮村)이고 또 궁촌 위쪽에는 궁방사(宮傍寺)라는 절이 있는데 옛 영은사이다.

지금 궁촌의 논밭 사이에는 궁터라고 지칭하는 곳이 있으나 깨진 주춧돌, 무너진 담장, 깨진 기왓장 등은 하나도 없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고려가 망하자 공양왕이 처음에는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간성으로 옮겨졌는데 1394년(태조 3) 갑술년에 삼척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당시 공양왕이 살던 집은 백성의 집에 불과하였고, 사망하였을 때 장례 또한 백성의 장례에 불과하였다.

지금 그곳에는 산지기 한 명이 있지만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관에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판재(板材)를 만들어 바치는 역(役)을 담당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이러하였다. 혹 처음에는 왕의 묘라 하여 산지기 한 명을 두었지만 나중에 분묘가 폐허화되어 산지기의 할 일이 없어지자 그의 역도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자료를 통하여 이미 조선 현종대에 공양왕이 삼척 지역에 유배된 이후 살해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궁촌, 궁방사, 궁터 등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 등 ‘궁(宮)’이 들어가는 형태의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비록 후대에 그 역할이 변질되지만 공양왕의 묘라 하여 산지기 한 명을 두었다는 기록은 이곳 삼척시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였고, 이에 지역에서의 위상이나 인식은 상당 수준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후 제작된 각종 지리지 등의 공양왕·궁촌 관련 내용은 앞의 내용을 전재하거나 이의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되었다.

『척주선생안』에는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공양왕릉의 봉토를 새로 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허목이 『척주지』를 기술할 당시에는 폐허화된 분묘를 이규헌 부사가 봉토를 새로 수축하였다는 사실은 민간뿐만 아니라 관청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기존에 전하던 공양왕릉 묘역을 광복 이후인 1977년 삼척군수 원낙희(元珞喜), 근덕면장 최문갑(崔文甲)이 현재의 봉분 형태로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이를 정비하면서 기초 발굴을 시도하였지만 마을 노인들의 반대로 정확힌 분묘 내부의 현상 파악은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양왕을 위한 제례는 살해당한 4월 27일 지내며, 마을에서는 서낭제사에 앞서 공양왕릉에 먼저 술을 올린 후 마을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공양왕릉과 공양왕의 동생·아들의 묘, 그리고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하여 총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공양왕릉은 별도의 둘레돌[호석(護石)]이나 문인석은 없고 제물 진설을 위한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의 상돌[상석(床石)]이 공양왕릉 앞에 놓여 있다.

고려 공양왕릉은 전국에 세 곳이 있다. 1394년 삼척에 유배되어 교살된 삼척시 근덕면 궁촌에 공양왕릉으로 불리는 왕릉이 있다. 또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고릉(高陵)이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이곳은 공양왕의 부인 노씨의 고향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한 강원도 고성에 있다. 고성에는 공양왕과 함부열(咸傅熱)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따라 공양왕릉의 위치에 관한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허목의 『척주지』에 공양왕릉을 관리하는 산지기를 두었다는 기록, 19세기 때 부사 이규헌이 삼척공양왕릉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공양왕의 무덤이 삼척 지역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삼척공양왕릉은 1995년 9월 18일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살해재(殺害재, 사라치(紗羅峙), 위치(位峙), 사래재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관련항목 보기에서 강원도 삼척시 원덕면 궁촌리로 가는 중간에 있는 고개.

살해재[殺害峙]는 해발고도 90m로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와 강원도 삼척시 원덕면 궁촌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대왕산[186.5m, 옛 이름 고돌산] 북쪽 기슭의 구 7번국도 상에 있다.

살해재의 명칭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두 왕자와 추종자 500여 명과 함께 이성계가 보낸 금부도사에 의해 살해된 장소라 하여 붙여졌다.

살해재의 기반암은 시대 미상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왕산[186.5m] 북쪽에 위치한다. 살해재를 불교계에서는 사라치(紗羅峙)라고 불렀고, 고려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라 해서 사가들은 위치(位峙)라 기록하기도 하였다.

살해재는 해파랑길 50코스 중 공양왕릉 입구에서 덕산해변 입구까지인 31코스 출발점에 해당된다. 해파랑길의 안내표지판에는 살해재를 ‘사래재’로 표기하고 있다. 4차선으로 확장된 7번국도 또한 살해골과 대왕골 사이에 있는 살해재를 통과한다.

1392년 8월 7일, 폐주 왕요는 쓸쓸하게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오늘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간성군(杆城郡)[21]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이때의 유배지명를 따서 '간성왕'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394년(태조 3)에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인 4월 17일에 공양왕은 반역을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왕자 석(奭), 우(瑀)와 교살당하였다.

살해재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은 인근 동산에 안장되는데,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면 궁촌리공양왕릉이라고 한다.

공양왕릉은 봉분이 모두 4개인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 2개는 왕자 석(奭)과 우(瑀), 나머지 하나는 시녀 또는 말의 무덤이라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공양왕릉이 퇴락하자 1837년(현종 3) 가을에 강원도 삼척부사 이규헌(李圭憲)이 개축하였고, 1942년 3월 20일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장 김기덕(金基悳)과 지역의 인사들이 다시 개축하였다. 최근에는 1977년 6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장 최문갑(崔文甲)이 허물어진 봉분을 다시 쌓았다.

『태조실록』과 『양촌집(陽村集) 』 등을 통해 1395년(태조 4)에 고려 왕조의 왕씨들을 위해 강원도 삼척과 강원도 강화, 경상북도 거제 등지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공양왕릉에서 먼저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음력 4월 17일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주관으로 매년 제향을 올린다. 그러나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외에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도 있다.

『세종실록』에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진영을 고양군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문화재청에서 공식 인정했고, 1970년 사적 제191호로 지정했다.

반면에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은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와 1855년(철종 6) 삼척부사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이곳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3년마다 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과 공양왕릉·궁촌(宮村)·궁기(宮基)·원평(院坪)·궁촌해변·궁촌초교·궁촌교 등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궁촌은 임금이 유배되어 머물던 마을이었으며, 궁기는 공양왕의 맏아들 왕석(王奭)이 살았던 곳이며, 원평은 마방(馬房)이 있던 곳이다.

고려조의 왕릉은 대개 군사분계선 이북에 있다. 남한에 남아 있는 것은 강화도의 석릉[21대 희종의 묘]과 홍릉[23대 고종의 묘], 그리고 공양왕릉 뿐이다.

공양왕릉 아래에는 삼척레일바이크 궁촌리정거장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공양왕릉 좌측 아래 배롱나무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사적.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번지 산65-6) 전경(출처:문화재청)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사적.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번지 산65-6)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의 무덤은 이곳뿐만 아니라 그가 살해된 삼척 지역에도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사적.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번지 산65-6)(출처:문화재청)

제 34대 공양왕恭讓王 1345~1394(1389~1392 재위): 신종(神宗)의 7대손
  
1. 휘: 왕요(王瑤)
2. 별칭: 정창군(定昌君)→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왕(王)→폐주(廢主) / 공양군(恭讓君)
3. 시호: 공양대왕(恭讓大王)
4. 능호: 고릉(高陵)
  
▲ 부친 정원부원군 균(定原府院君 鈞 ?~?): 신종의 6대손
  
1. 가계
-조부: 익양후 진한국인숙공 빈(益陽侯 辰韓國仁肅公 玢 ?~1291)
-조모: 진한국장경비 박씨(辰韓國莊敬妃 朴氏)
-부친: 순화후 유(淳化侯 柔 ?~1360)
-모친: 마한국명예비 신씨(馬韓國明睿妃 申氏)
2. 별칭: 정원군(定原君)→정원백(定原伯)→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3. 시호: 삼한국인효대공(三韓國仁孝大公)
4. 부인: 삼한국대비 왕씨(三韓國大妃 王氏)
5. 자녀(2남)
*아들 공양왕 요(恭讓王 瑤 1345~1394)
*아들 정양부원군 우(定陽府院君 瑀 ?~?)
  
▲ 모친 삼한국대비 왕씨(三韓國大妃 王氏): 개성 왕씨
  
1. 가계
-증조부: 충렬왕(忠烈王)
-증조모: 정신부주 왕씨(貞信府主 王氏)
-조부: 강양공 자(江陽公 滋 ?~1308)
2. 별칭: 복녕궁주(福寧宮主)
3. 자녀(2남)
*아들 공양왕 요(恭讓王 瑤 1345~1394)
*아들 정양부원군 우(定陽府院君 瑀 ?~?)
 
★ 순비 노씨(順妃 盧氏): 교하 노씨
  
1. 가계
-조부: 경양부원군 노책(慶陽府院君 盧頙 ?~1356)
-조모: 경녕옹주 왕씨(慶寧翁主 王氏)
-부친: 창성군 제효공 노진(昌城君 齊孝公 盧稹 ?~?)
2. 별칭: 왕비(王妃)→폐비(廢妃)
3. 자녀(1남 3녀)

*장남 세자 석(奭 ?~?)

*장녀 숙녕궁주(肅寧宮主)

*차녀 정신궁주(貞信宮主)

*3녀 경화궁주(敬和宮主)

☆ 장남 세자 석(奭 ?~?): 순비 노씨 生
  

1. 초명: 왕서(王瑞)
2. 별칭: 정성군(定城君)→세자(世子)→폐세자(廢世子)
3. 부인
-세자비 인주 이씨(李氏): 경원군 이원굉(慶源君 李元紘 ?~1405)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