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강원도

삼척 죽서루(三陟竹西樓)

노촌魯村 2023. 8. 19. 20:21

삼척 죽서루(三陟竹西樓. 보물.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44(성내동))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관 있는 조선시대 정자.

죽서루의 이름은 누(樓)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고 그 죽림 속에 죽장사가 있다 하여 죽서루라 하였고, 또 다른 설로는 누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가 있었다 하여 죽서루라 불렀다고 전해 오는 정자 건물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인 죽서루(竹西樓)는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자리 잡고 있다.

창건자와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1266년(고려 원종 7)에 동안거사(動安居士)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안집사(安集使) 진자후(陳子候)와 같이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겨 둔 것을 보아 1266년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 주변에는 고려시대에 죽장사(竹藏寺), 조선시대에 진주관(珍珠館)·응벽헌(凝碧軒)·연근당(燕謹堂)·서별당(西別堂) 등 여러 건물을 지어 놓고 선인(先人)들이 그 경관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진주관은 죽서루 북쪽에 있었다. 조선시대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객사였다. 1908년에 삼척군청으로 이용하다가 1934년에 헐어 없앴다.

응벽헌은 응벽담 위쪽 진주관의 서헌(西軒)이다. 1518년에 부사 남순종(南順宗)이 창건하였지만 1908년에 헐어 없앴다. 서별당은 연근당 아래에 있었다. 1586년에 부사 강세윤(姜世胤)[1521~?]이 창건했다가 없어진 것을 1661년 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다시 지어서 독서당으로 사용했다. 연근당은 죽서루 남쪽에 있다.

1442년(세종 24)에 부사 민소생(閔紹生)이 죽서루의 별관으로 창건하였으며, 대소객(大小客)의 안식처로 사용되었지만 근년까지 있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죽서루는 경치 좋은 절벽 위에 건축하기 위하여 자연 암반을 기초로 삼았다. 누하층에는 17개의 기둥이 있다. 그 가운데 9개의 기둥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우고 나머지 8개의 기둥은 석초(石礎)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이 세워진 7간(間)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

누각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제액(題額)은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 누 안쪽의 ‘제일계정(第一溪亭)’ 글씨는 1622년(현종 3) 부사 허목의 글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1837년(헌종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다.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 있고, 가까이는 근산(近山)·갈야산(葛夜山)·봉황산(鳳凰山)이 솟아 있어 누각을 에워싼 모습이 마치 삼신산(三神山)의 선경(仙境)을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50굽이나 휘돌아 흐른다 하여 이름이 붙은 오십천(五十川)은 누각 밑의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면서 응벽담(凝碧潭)이란 깊은 소(沼)를 만들어 놓았다. 응벽담은 맑기도 하지만 천길 벼랑에서 내려다보면 누구나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응벽담 속에서 노니는 고기떼 모습은 죽서루의 색다른 풍경이다.

관동팔경이 다 해안 경치를 끼고 있지만 죽서루만은 해안을 볼 수 없는 것이 특색이다. 여기에다 봄가을로 백구(白鷗)가 찾아와 노니는 모습은 이곳 풍경을 한층 더 선경이 되게 한다.

누에 올라 바라보는 오십천과 절벽의 경치, 거기에 제비같이 날 듯한 누각을 지어서 조화를 이룩한 이 경관은 조물주의 기묘한 솜씨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겠다.

예부터 시인 묵객이 이곳에 무수히 찾아와 청유(淸遊)하면서 시 한 편 남기지 않은 사람 없을 정도로 죽서루는 시문 많기로 이름이 났다.

고려충렬왕 때 이승휴를 필두로 이곡(李穀)[1298~1351]·안축(安軸)[1282~1348]·정추(鄭樞)[1333~1382]·김구용(金九容)[1338~1384]·김극기(金克己) 등과 조선시대 숙종대왕·정조대왕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하륜(河倫)[1347~1416]·이륙(李陸)[1438~1498]·심언광(沈彦光)[1487~1540]·이이(李珥)[1536~1584]·양사언(楊士彦)[1517~1584]·차운로(車雲輅)[1559~?]·정철(鄭澈)[1536~1593]·허목·신광수(申光洙)[1712~1775] 등 명인대가(名人大家)의 시문이 200여 수 남아 있어 그야말로 죽서루는 시문의 터라 할 수 있다. 특히 송강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죽서루를 크게 찬양하여 죽서루 광장에는 ‘송강 정철의 가사터’라는 시비가 서 있다.

삼척 죽서루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남측 측면은 3칸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북측 측면은 2칸

누하층에는 17개의 기둥이 있다. 그 가운데 9개의 기둥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우고 나머지 8개의 기둥은 석초(石礎)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이 세워진 7간(間)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누각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제액(題額)은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

죽서루 내 편액(竹西樓內扁額)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37의 죽서루에 걸려 있는 편액.

죽서루는 삼척 관아의 객사인 진주관(眞珠館)에 딸린 누각이다. 그러나 이 죽서루를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명종 대 문신 김극기(金克己)가 죽서루 관련 시를 지은 것을 보면 12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허물어진 건물을 1403년(태종 3)에 당시 부사 김효손(金孝孫)[1373~1429]이 옛 터에다 중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는 원래 정면이 5칸이었지만 나중에 좌우 1칸씩 증축하여 7칸이 되었다. 반면에 양 측면은 칸수가 다르다. 북쪽 측면은 2칸인 데 비해 남쪽 측면은 3칸이다. 그리고 죽서루의 공포는 주심포(柱心包)와 익공(翼工) 두 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다.

한편 죽서루는 상층과 하층 2층으로 나눠지며, 상층과 하층의 기둥 수가 다르고 기둥 길이도 각각 다르다. 이는 높고 낮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건물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활용한 경우에도 다듬지 않고 글겅이질을 하여 기둥과 초석을 밀착시켰다. 이처럼 죽서루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로 세워졌다.

과거 죽서루(竹西樓)는 관동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주위 경관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시인·문사가 사시사철 찾아왔다.

시작(詩作)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이던 만큼 방문객들은 예외 없이 죽서루 누마루에서 즐긴 주위 풍경의 시원한 눈 맛을 시로 읊고 남겨 두었다. 이에 따라서 죽서루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문사들의 주옥 같은 글을 새긴 편액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1959년 9월에 삼척 지역을 엄습한 태풍 사라호로 말미암아 현판 대부분이 유실되고 지금은 28개의 편액만이 걸려 있을 뿐이다.

죽서루 편액을 글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죽서루’ 및 그 별호(別號)를 새긴 편액이 5개, 시를 쓴 편액이 17개, 기문(記文)을 쓴 편액이 6개이다. 이 밖에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과 기부금방명기(寄附金芳名記)를 쓴 편액이 1개씩 있다. 비록 시를 쓴 편액은 17개이지만 그 안에는 28편의 시가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정조와 이이(李珥)[1536~1584]·이구(李龜)[1469~1526]의 시는 1992년에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1921~2006]이 쓴 글씨를 새겼고, 정철의 시는 1992년에 일죽 홍태의가 쓴 글씨를 새겼다. 또 강징(姜澂)[1466~1536]의 시를 쓴 편액은 2003년에 다시 제작하여 게첩(揭帖)한 것이다.

① ‘죽서루’ 및 그 별호를 쓴 현판 ‘죽서루’를 쓴 편액이 2개이다. 그 가운데 해서체로 쓴 것은 숙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성조(李聖肇)[1662~1739]의 작품이지만 정자로 굵게 쓴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 글씨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역시 이성조의 작품이다. 글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규헌(李奎憲)의 작품이고,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許穆)[1595~1682]이 썼다고 한다.

② 시를 쓴 편액 시를 쓴 편액 17개에 들어 있는 시 28편 가운데에는 숙종과 정조가 쓴 시가 1편씩 있다. 또 삼척부사를 지낸 자 6명의 시 9편과 삼척군수를 지낸 자 1명의 시 1편이 있다. 또 강원감사를 지낸 자 2명의 시 3편도 있다. 특히 선조와 후손의 시를 함께 써 놓은 편액도 2개 있다. 그리고 시를 쓴 작가를 보면 이구와 이승휴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시대 사람이다.

③ 기문을 쓴 편액 허목이 삼척부사로 있던 1662년(현종 3)에 쓴 ‘죽서루기(竹西樓記)’와 1921년에 죽서루를 중수할 때 이학규(李鶴圭)가 지은 ‘죽서루중수기(竹西樓重修記)’를 쓴 편액이 있다. 또 1947년에 죽서루를 중수할 때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중수기’와 1991년에 당시 삼척시장인 김광용(金光容)이 지은 ‘중수기’를 쓴 편액도 걸려 있다.

④ 기타 편액 1971년에 죽서루를 중건할 때 홍종범(洪鍾凡)이 지은 ‘죽서루중건상량문(竹西樓重建上樑文)’을 쓴 편액이 있다. 1947년에 죽서루를 중건할 때 기부금을 낸 인물과 회사·단체의 이름과 기부금 액수를 기록한 ‘죽서루중수기부금방명기(竹西樓重修寄附金芳名記)’를 써 놓은 편액도 있다.

과거 죽서루를 찾은 수많은 시인과 문사들은 누각이 자리 잡고 있는 기암절벽과 멀리 또는 가까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산경, 누각 아래를 흘러가는 오십천이 만들어 놓은 응벽담(凝碧潭), 누각 주변에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정경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절경의 파노라마에 찬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특히 유람객들은 이러한 죽서루의 절경이 바다와 떨어져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숙종 어제시

어제시御製詩 : 강원도 삼척 지역을 대상으로 왕이 직접 지은 시.

어제시(御製詩)는 왕이 직접 지은 시로, 자신의 통치 신념과 국가 및 백성을 향한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조선의 왕 가운데 숙종은 삼척의 죽서루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기도 하였다.

숙종 외에도 정조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가 어명을 받고 그린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금강산 일대 4개 군의 명승지를 그려낸 화첩] 가운데 일부인 죽서루의 그림을 보고 직접 어제시를 짓기도 하였다.

숙종과 정조가 삼척 죽서루를 시(詩) 대상으로 지은 어제시는 기승전결 구조로 된 7언 절구 형태이다.

숙종의 어제시는 숙종이 죽서루의 풍경을 칭송하고 이를 시로 지어 삼척부사 이상성(李相成)[1663~1723]에게 편액을 조각하여서 걸게 하였다.

숙종 어제시

율올층애백척루(硉兀層崖百尺樓) : 위태로운 벼랑 위에 우뚝 솟은 백척루

조운석월영청류(朝雲夕月影淸流) : 아침엔 구름 저녁엔 달 맑은 물에 비치네

인린파리어부몰(粼粼波裡魚浮沒) : 맑디맑은 물결 속에서 고기떼 뛰놀고

무사빙연압백구(無事凭欄狎白鷗) : 한가로이 난간에 기대 백구를 희롱하네

 

정조 어제시

조석휴애기일누(彫石鐫崖寄一樓) : 돌 다듬고 절벽 다듬어서 세운 누각 하나

누변창해해변구(樓邊滄海海邊鷗) : 누각 옆은 푸른 바다요 해변에는 갈매기라

죽서태수수가자(竹西太守誰家子) : 죽서 태수는 누구 집 아들인가

만재홍장복야유(滿載紅粧卜夜遊) : 미녀 가득 싣고 밤 새워 뱃놀이 하는도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정조 어제시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진주곤眞珠觀(객사)
응벽헌(凝碧軒)

죽서루 자연교(竹西樓自然橋 이칭(별칭):용문龍門)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있는 아치 모양의 카르스트 지형.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 주변 암반에 발달한 카르스트 지형으로, 용문이라고도 부른다. 용문이란 이름은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죽은 후, 호국의 용이 되어 오십천에 뛰어 들어가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으며, 이 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석회암 지역에서 지하를 흐르며 동굴을 발달시킨 지하수들은 동굴 내에서의 하천쟁탈에 의해 유로가 변경되면 물이 흐르지 않는 터널이 그 뒤에 존재하게 된다.

물이 흐르지 않는 터널이 지상에 노출되어 일부만 남아 있거나, 중력의 작용으로 터널이 붕괴된 후 천장의 일부가 좁게 골짜기 위에 얹혀 있게 되면 자연교라는 특수한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게 된다.

죽서루[보물] 암반에 있는 용문은 전자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죽서루 자연교[용문]는 석회암이 지하수에 의해 용식작용을 받은 결과물이다.

죽서루 자연교 주변의 석회암 암반의 용식구(溶蝕溝)와 암반을 넘나드는 통로 역할을 하는 곳들도 모두 용식작용을 받은 흔적들이다.

죽서루 자연교는 주로 용문이라 불리며, 신라 시대의 문무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 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었다고 한다.

용문 위에는 선사 시대의 암각화로 여겨지는 성혈(性穴) 10개가 있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 신앙의 형태인 것이다. 성혈은 인위적으로 만든 구멍인데, 석회암이 다른 암석에 비해 연마하기가 쉽기 때문에 매우 정교하게 뚫려 있다. 죽서루가 있는 곳은 석회암 절벽 위이다. 석회암 절벽은 오십천의 공격사면에 해당된다. 석회암 암반 위에 자연스럽게 건축된 죽서루의 자연친화적 공법이 특징적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성혈(性穴)

성혈(性穴)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회화나무 槐木, Chinese Scholar Tree

학명 : Sophora japonica L.

분류체계 : Magnoliophyta 피자식물문 > Magnoliopsida 목련강 > Fabales 콩목 > Fabaceae 콩과 > Sophora 고삼속

콩목 콩과에 속하는 관속식물이다.

공원이나 길가에 관상용으로 심어 기르는 낙엽 큰키나무로 높이 15~25m, 지름 1~2m 정도로 자란다.

나무껍질은 어두운 회색이고 세로로 갈라진다. 잔가지는 녹색이고 짧은 흰색 털이 밀생하며 자르면 냄새가 난다.

잎은 어긋나며 홀수 깃꼴겹잎이고 작은잎은 7~15장이다. 작은잎은 난형 또는 난상 타원형으로 길이 2.5~6.0cm, 폭 15~25mm이다. 잎끝은 뾰족하고 밑은 둥글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잎 앞면은 녹색, 뒷면은 회색이고 잔털이 있다. 작은잎자루는 짧고 털이 있다.

꽃은 7~8월에 피는데 황백색이고 가지 끝에서 나온 원추꽃차례에 달린다. 꽃차례 길이는 15~30cm, 짧은 누운털이 있다.

열매는 협과, 염주처럼 굴곡이 졌으며 길이 5~8cm, 10월에 익는다.

우리나라 고삼속 식물 중에서 유일한 큰키나무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고삼은 여러해살이풀이며, 꽃은 총상꽃차례에 달리므로 다르다. 공원수, 가로수로 식재하고, 목재는 가구재로 이용한다. 나무, 뿌리, 꽃, 열매 등을 약용한다. 회나무, 과나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식재하며, 중국에 분포한다. (출처 : 국립생물자원관-한반도의 생물다양성)

 

회화나무(槐花─, 학명: Sophora japonica)는 콩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대한민국, 중국이 원산지이며 한반도·일본에도 분포한다.

키는 25m에 이르고 나무껍질은 진한 회갈색이며 녹색의 어린가지는 흰 가루로 덮여 있어 자르면 냄새가 난다. 잎은 타원형의 어긋나 있으며 작은 잎의 길이는 약 2∼6cm 정도이고 너비는 약 1.5∼2.5cm이며 7∼17장이다. 잎의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 뒷면은 회백색으로 짧고 누운 털이 있다. 꽃은 8월부터 개화하며 그 모양은 연한 노란색으로 새 가지 끝에서 길이 20∼30cm의 원추꽃차례로 핀다. 열매는 9월∼10월에 노란색으로 익으며 꼬투리는 길이 5∼8mm로서 잘룩잘룩하게 아래로 달리며 약간 육질이다. 또한 씨는 1∼4개이고 갈색이다. 아카시나무와 잎의 모양이 유사하나 꽃과 열매로 구분하기 쉽다.

회화나무의 열매, 껍질, 작은 가지 등 회화나무의 각 부위를 모두 한약재로 쓴다. 꽃은 동맥경화와 고혈압 등에 쓰이고, 열매와 가지 및 나무껍질은 치질 치료에 이용된다. 결이 아름답고 목재가 견실하여 목조각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꽃봉오리는 천연염료 및 약재로 많이 이용된다. 그 밖에 조경수, 가로수, 기념수 등으로 이용된다. 그 외에도 악귀를 물리쳐 줄 수 있는 마법의 묘약을 가지고 있는 특이사항을 둔다.

예부터 회화나무를 집에 심으면 가문에 큰 인물이나 큰 학자가 나온다고 하여 길상목으로 불렸다. 그로인해 임금이 관리에게 회화나무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 한 가지의 모양이 자기 멋대로 쭉 뻗어있고 열매는 초를 켤 때 사용하는 기름으로 이용되어 학자를 나타낸다.(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