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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東海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

노촌魯村 2023. 9. 23. 06:24

천왕문 (天王門)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앙하였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 지점의 동서남북 사천에서 그들의 무리와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남쪽을 지키는 중장천왕,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천왕들은 부릅뜬 눈에 치켜 올려진 검은 눈썹과 크게 벌린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갑옷을 걸치고 큰 칼을 들고 있으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지만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 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뜻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977년 건축하였으며, 천왕대신 사천왕 태화를 모셨다. (출처 : 삼화사)

삼화사 적광전

적광전 (寂光殿)

삼화사의 본전인 중심법당으로 정면 5칸, 측명 3칸의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이 화려한 큰 법당이다.

1977년 사찰이전 때 옮겨세웠으며 1997년 중수하였는데, 국가지정보물인 철조노사나좌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 위쪽으로는 화려한 닫집이 조성되어 있고 팔작지붕의 추녀모서리는 콩포를 돌출시켜 연꽃이 환하게 피어난 느낌을 준다.

적광전은 화엄을 중시하는 선종사찰의 하나로 진리의 빛이 가득한 적정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적광전 현편과 주련은 탄허 스님의 친필을 묘사한 것으로 주련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護林示減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사라쌍수 열반아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 금유재)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普化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후)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지 않게 하리.

(출처 : 삼화사)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東海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 보물. 강원 동해시 무릉로 584, 삼화사 (삼화동))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 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 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출처 : 문화재청)

 

철조노사나좌불(보물 제1292호)

이 불상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삼화사 개창 초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화사 철불은 약사불로 전해져 왔으며 오랜 수난의 역사와 함께 많이 훼손되었으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여러 사람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 철불이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 태백산지구조사반이 1967년 12월 제7차 최종 조사를 할 때였다.

조사반원 중 진홍섭은 <삼화사의 탑상>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이 철불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사람 얼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 높이는 40cm, 어깨 폭 68cm, 두께는 0.5~1cm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 공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오르듯 두드러져 있다. 이는 고려 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인데 융기된 것 같이 보인다.

의문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꺾이면서 연자오대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 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철불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1967년 당시만 하더라도 훼손 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 중기 이후로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때는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 갈 뻔한 일도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 설화 참조)뿐만 아니라 훼불의 상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대로 법당에 안치하고 불자들의 귀의를 받게 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재발견된 이후 한동안 단칸 불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 마침내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제11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1997년 4월에 이 절의 주지 자광 원행 화상의 원력으로 복원 불사가 추진되어 파불이 아닌 예경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는 다름 아닌 불상 배면에 돋을새김으로 남아있는 명문이었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이 불상의 비밀 몇 가지가 밝혀졌다. 제작 연대에 관해 지금까지 이 불상은 제작 수법이 측면에서 고려 시대 철불로 인정됐다. 그리고 존상의 명칭은 창건설화의 기록에서 보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명문을 세밀히 분석해 본 결과 이 사실이 모두 뒤집혔다. 즉, 불상의 제작 연대는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 말로 추정된 것이다. 또 제작 수법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한 결과 신라하대 철불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들이 확인되었다. 나발 위에 솟은 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삼도와 통견법의 등은 보림사 철불이나 도피안사철불과 흡사했다.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 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작 당시 이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었다.

삼화사 철불은 오래도록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이는 창건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명문에는 이 불상의 존명이 약사불이 아니라 '노사나불' 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본명 확인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신라말고려초기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문화재급 철불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철불상 존명은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류를 이르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삼화사의 경우처럼 신라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삼화사 철불의 명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의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파불상태에 있던 불상을 복원해 귀의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그 모형으로 제작해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시켰다.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정이 아닌 적광전으로 걸었다. (출처 : 삼화사)

 

출처 : 문화재청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 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출처 : 문화재청